〈25〉글쓰는 도구 넘어 혼을 입히는 울산무형문화재 3호 김종춘 모필장
〈25〉글쓰는 도구 넘어 혼을 입히는 울산무형문화재 3호 김종춘 모필장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4.05.22 13: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7세에 붓과 인연 맺어
한 생을 붓 작업에 쏟아
산마필은 시그니처 붓돼
남은 생도 전통붓에 기여
울산시 무형문화재 ‘모필장’ 김종춘 선생이 대형 ‘산마필’을 들고 설명하고 있다.
울산시 무형문화재 ‘모필장’ 김종춘 선생이 대형 ‘산마필’을 들고 설명하고 있다.

걷잡을 수 없이 피어난 꽃과 잎들은 넘치는 활력으로 싱그러운 오월을 합창하는 듯하다. 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면 청춘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평생 청춘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청춘은 단지 젊은 시절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며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로 삶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신선함과 경이로움에 끌리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마음속 깊이 청춘의 싱그러운 에너지를 받아들이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도 갖게 된다.

인생의 희망과 환희를 간직한 채 울주군 두동면 묵장산 자락에 터를 잡고 붓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울산시 제3호 무형문화재 김종춘 모필장을 만났다. 종이, 먹, 벼루와 함께 문방사우의 하나인 붓은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풍류에도 한 획을 그었으며 묵화나 서예 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붓은 그림이나 글씨를 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학문을 상징하는 결정체이며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곧은 절개의 표현이기도 했다. 붓은 다양한 의미를 함의한 동양문화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임에 틀림없다.

“문서의 전산화와 다양하고 편리한 필기구가 붓을 대체하는 요즘 수요가 급격히 줄었지만 적지 않은 서예가들로 인해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며 붓을 만드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붓에 내포된 함의에 혼을 불어 넣어 죽림산방에서 전통기법으로 붓을 만들고 있으며 아내와 딸이 전수자의 길을 걷고 있다.

■전통붓과의 동행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을 겪고 그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7세에 고향인 밀양의 김형찬 선생 필방에서 붓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농사는 적성에 맞지 않아 우연히 뒷집 친구네 놀러가서 붓 만드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었더니 “붓을 만들면 먹고 사는 것은 지장이 없겠다”고 한 말이 80이 넘은 지금까지도 붓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김형찬 선생의 필방에서 붓 만드는 일을 배운지 3년이 되자 스승은 그를 모필장으로 인정하여 호비칼, 치계, 작죽칼을 하사했다. 호비칼은 나무의 속을 파내는데 사용하고 치계는 붓모를 정돈하는 빗이다. 작죽칼은 붓대를 매끈하게 다듬는 도구로 붓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세가지 핵심 요소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모필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 후에도 그는 전국의 유명한 모필장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연마하고 스스로 개발하는 것에 게으르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했다.

“24세에 입대 해 제대 5개월을 남겨두고 다시 붓을 만들어야 하나, 월남 파병을 가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집에 알리지 않고 1966년 월남파병을 지원했다”며 “15개월의 복무를 끝내고 28세에 제대해서 부산에 거주하던 친구의 립스틱 솔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도왔다. 그 일 또한 짐승의 털로 만드는 것이므로 나와 붓과의 인연은 불과분의 관계”라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몇 개월 일을 하다 대구에 가서 정착한 후 중매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홀로 서울로 가서 자리를 잡은 후 아내와 합류했다. “1969년 제자 7명을 데리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월세가 1500원할 때 18mm 정도의 붓 한 자루가 2만원을 했다”며 “제자들의 월급과 월세를 충당하고도 여력이 되는 정도라 1년여 동안은 판매할 수 있는 양의 붓을 제작해놓고 재료구입과 털의 특성에 몰두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붓 작업의 번성기를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후 울산 태화강변에 정착한 그는 필방의 위치나 태화강이 울산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태화붓으로 불리며 전통 붓 제작에 몰두했고 울산의 태화붓을 널리 알렸다.

울주군 선바위도서관 ‘石(석)과 魂(혼)의 만남’ 특별전에 전시된 김종춘 모필장의 대형 산마필.
울주군 선바위도서관 ‘石(석)과 魂(혼)의 만남’ 특별전에 전시된 김종춘 모필장의 대형 산마필.

■좋은 붓을 만드는 요소

“붓을 만드는데 150번 이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가장 기본이 되는 정모과정만 해도 몇 차례의 손질을 거쳐야 하고 규격에 맞춰 털을 일일이 저울에 달아 무게를 측정하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면서 “미세한 오차도 용납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붓을 만들 수 있다”고 섬세한 작업 과정을 설명했다. 

“좋은 붓은 역시 좋은 재료가 결정한다”면서 “네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붓 끝이 날카롭고 예리한 것, 굽은 털이 없이 가지런하고 잘 정돈된 것, 붓털의 모양이 모 난 것 없이 둥근 것, 붓털이 모두 곧으면서 수명이 길어야 한다”면서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장의 혼과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그 가치를 제대로 발현하는 것이라고 쟁이의 면모를 언급했다.

“과거 해녀들의 잠수복은 온 몸을 감싸지 않고 노출되어 있어서 겨울에 작업을 할 때는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몸에 열을 내고 추위를 이기기 위해 해녀들은 백염소를 약으로 먹었다. 그래서 염소의 털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잠수복이 잘 만들어져 추위를 이겨내려고 염소를 먹는 일은 거의 없어 염소 털을 구하기 힘들다“고 재료 구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제주도 말의 털은 날씨가 따뜻해서 모가 굵은 것이 단점이다”면서 “너구리 등 털로 만든 양모붓,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황모붓, 노루의 겨드랑이 털로 만든 장액붓 등 재질에 따라 다양한 붓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춘 모필장은 "인조모는 1%도 용납하지 않는다”며 “붓의 원료가 되는 짐승의 털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어져 달리 방법을 모색하다 내몽골과 호주 말의 꼬리털을 재료로 사용했다”고 확고한 소신을 밝혔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말의 꼬리털을 이용해 만든 산마필은 그의 시그니처 붓이 되었고 호주에 직접 가서 말 꼬리 털을 가져와 최고의 붓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간절한 바람이다. 그가 만든 산마필 중 무게 8~9kg에 달하는 대작도 있어 현재 선바위도서관에서 유길훈 벼루장의 ‘石(석)과 魂(혼)의 만남’ 특별전에 함께 전시되어 관람객들에게 문방사우의 역할을 알리고 있다.

■산마필은 시그니처 상품

현재 산마붓은 전국에 유통되고 있으며 노루 겨드랑이털 붓은 전국에서 최고로 인정받아 2010년에는 마사박물관 특별전시 ‘말총공예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꼬리’전에 출품하여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04년에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보유자로 지정된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산마필로 출품하는 등 수차례 입상은 물론 TV 방송에도 출연해 전통 붓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지역 언론에 산마필이 소개 된 후 1999년 ‘6시 내고향’에서 대형 붓이 특종이 되어 글씨를 써보라고 해서 대구의 ‘율산 선생’을 초대해 큰 산마붓으로 글씨를 쓰는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될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또한 출생한 아이가 백일이 될 무렵 처음 자른 머리카락(배냇머리)으로 만든 태모필은 상징적인 의미로 큰 선물이 된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붓으로 만들어 태어난 날짜를 새긴 후 장인의 낙관을 찍어 특별함을 더하는 소중하고 뜻 깊은 선물이다.

“내가 만든 붓은 쓰면 쓸수록 끝이 나서 10년 전에 구입한 서예가가 이제 바꿀 때가 되었다며 새 붓으로 바꿔갔다”며 “잘 만들어진 붓은 수명이 길고 끝이 갈라지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여든을 넘은 나이에도 묵묵히 전통을 지키며 붓에 혼을 불어넣고 있는 그는 말없이 서 있는 푸른 묵장산처럼 묵직하고 위대하다. 그의 오랜 바람처럼 가족들과 호주로 떠나 좋은 재료를 맘껏 느끼고 그 재료로 생애 남을 만한 붓 제작에 혼을 불어 넣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울산에서 붓의 명맥을 지키고 있는 김종춘 모필장의 생은 붓글씨를 쓸 때 오던 길을 버리지 않고 반드시 되돌아가 다시 세우는 회봉처럼 언제나 붓과 함께였다. 

'중봉을 잘 잡아야 붓이 춤을 춘다'는 말처럼 붓과 오랜 인연을 맺고 사는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인생의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과, 운명처럼 마주한 붓이 있어 늘 푸른 청춘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꼬리에 전통의 가치를 더하고 있는 그의 삶이 붓이 춤을 추듯 행복하게 귀결되기를 바란다. /칼럼니스트·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