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과 해석들
담론적 구성물,
해석의 해석
역사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다툼을 보면 시민 다수가 그렇듯 불편하다. 각자의 입장과 시각차가 있겠지만 각박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얘기고 대개는 출구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에겐 다른 불편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답답함과 안타까움이다. 수일 전에도 지인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말하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좌파’ 혹은 ‘우파’로 몰아붙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강변하면서.
그럴 땐 늘 난감함은 필자의 몫이다. 역사 정보를 비교적 많이 접해왔고 고민 또한 깊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색다른 의견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이 따른다. 물론 평균적 시민이 나름 접한 역사 정보와 특정 신념에 기초하여 논평한다고 이상할 것은 없지만. 어떻든 당시 시민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내놓았던 의견 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객관적 역사는 가능한가? 이다. 언뜻 들으면 당연히 그렇지 싶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다. 객관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각자의 세계관, 역사 인식, 가치와 태도, 정치적 주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실에 대한 제한적이고 편견적인 ‘주관적’ 시각을 배척하고, 정확하고 중립적인 ‘객관적’ 시각을 추구한 것이다. 특히 19세기 유럽에서는 100% 객관적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신념 속에서 정확, 초연, 순결 등 가치 중립적 태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 “이념은 역사에서 폭력이다” “역사를 쓰는 것은 내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통해 역사를 쓴다” 등은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주장들이다. 말하자면 사실에 대한 해석은 오직 하나라는 의미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그런 생각에 붙잡힌 자들이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그런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주장은 상대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 바탕에는 “당신의 눈과 귀는 오래전부터 현실의 여러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 “인간은 자신이 뿜어낸 의미의 그물망 가운데 고정되어있는 거미와 같은 존재다”라는, 사회와 문화에 구속된 존재로서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역사는 신념의 행위다” 등 주장은 사실에 대한 해석이 하나만이 아니라 여럿 일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물론 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객관은 “실재와 일치하는 진실이 있다는 믿음”이었으며, 과거 ? 현재 - 미래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한 역사를 위한 변론은 궁색하고 억지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 시민 다수가 받아들이는 해석의 다양성은 그렇게 담보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이다.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좌우의 온갖 거대담론과 가치체계가 흔들리고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이 해일처럼 전 지구를 휩쓸었다. 포스트모던 역사학은 그런 환경에서 자라났다. “역사적 실재를 재현한다는 주장은 허구다” “역사는 하나의 담론적 구성물이다” 등 주장은 사실에 대한 하나이든 여럿이든 해석이 사실의 함수라는 점 자체의 부정이었다. 대신 역사를 문학 텍스트로 보고 텍스트의 해체적 읽기를 통해 사실을 생산하려고 했다. 그래서 역사는 해석이며 담론이며 ‘해석에 대한 해석’이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전통적 역사 관념은 힘을 잃었다. 역사의 추동력은 과거처럼 신, 이성, 개인, 사회가 아니라 담론과 문화로 인식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의 중요성 또한 그 자리를 문화에 빼앗겼다. 담론은 인간 경험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지식 양식을 구성하며, 어떤 지식이 진리이고 허위인지 가려내는 기준을 제공하고, 지식의 구분 및 차별을 정당화한다. 다시 말해 담론은 정체성을 만들고, 현실을 구성하며, 실재를 설명해준다. 그래서 담론으로서 역사는 특정 계급이나 집단이 과거를 전유하면서 정체성과 삶의 지향점을 구성하는 수단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은 이러한 역사연구의 추이와 논리적 사실적 궤를 같이한다.
역사는 넓게 보면 집단적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료라는 형식으로 보전되며 그것도 ‘선택된’ 것만이 의미가 있다. 그마저도 ‘기억된’ 일부만이 현실적 역사가 된다. 누가 어떤 자료를 왜 선택하고 어떻게 기억하고자 하는가? 그것을 구속하는 것이 담론이며 문화다. 역사가 담론적 구성물인 이유다. 사실은 무대 뒤로 퇴장하고 해석이 활극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의 절대 기준은 사실(fact) 자체라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정확한 논리와 명백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특정 집단을 위해 복무하는 담론적 역사는 이미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상상력의 경계를 확장하고 과거와 현재에 대한 편협한 사고를 줄이는데” 이바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