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속
봄 속
  • 조희양
  • 승인 2013.03.2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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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 버들개지가 먼저 포슬하니 피어 마을 쪽으로 봄소식을 보내왔다. 그러자 바통을 이어받듯 뒷산 생강나무가 꽃을 피워 알싸한 향을 산 아래로 내려 보냈다. 이렇게 모여든 봄소식들이 머츰머츰 하던 동네 꽃봉오리들을 흔들어 꽃을 피우는 어느 햇빛 환한 날.

차를 운전해 마트에 가는 길이었다. 골목 사거리는 비어있었고, 급할 것도 없는 나는 천천히 후진해 차를 돌리는 중이었다. 누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웬 남자였다.

감색 점퍼를 입은 남자는 바지에 손을 넣은 채 가다 돌아보기를 몇 번 하더니 아예 이쪽으로 돌아서서 쳐다보았다. 쉰을 훌쩍 넘긴 것 같은데 이 동네에서 십여 년을 살고 있지만 처음 보는 남자였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 아직은 내가 봐 줄만 하지. 낼모레 나이 오십을 바라보지만 아직은 사십 대. 바람 같은 스침에 흔들릴 수도 있는 꽃이지. 그때부터 대수롭잖던 내 행동을 꾸미기 시작했다.

아닌 척 하면서 좀 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시선에 답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이없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운전해서 15분 거리라 민낯이었건 거다. 썬크림 밖에 안 발랐는데 싶고, 립스틱이라도 바를 걸 하고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룸미러를 내려 얼굴을 들여다봤다. 가까운 거리는 맨 얼굴로 다녀도 될 정도로 피부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우중충하니 잡티도 커 보였다. 후드 티셔츠에 모자를 쓴 선머슴 같은 차림새는 또 어떻고.

후줄근한 차림새라 맘에 걸리긴 했지만 낯선 남자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한낮의 골목은 여전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서 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가 눈치 못 채도록 느릿느릿 차를 아직 돌리는 중이었다.

장갑을 벗었다 끼었다 시간을 흘리면서. 무심한 척 하면서 남자의 거동을 살폈다. 달려와 전화번호를 묻거나 명함을 주고 갈 폼은 아니었다. 그 또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할깃거릴 뿐이었다.

그를 지나쳐 떠날 시간이었다. 그때 부드러우면서도 맵싸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니, 이건 뭐야?

순간 당황했다.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내가 아니었다. 창문 밖으로 목을 뺀 채 후진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그 날도 문을 연 채 후진을 했던 거다. 창문을 열어놓고 후진을 하든, 차 문을 열어놓고 전진을 하든 놀랄 일은 아니다만.

지금까지 들리지 않던 노래가 들려왔다. 혜은이의 ‘당신만을 사랑해’ 노래가 열린 창문으로 지나가던 남자를 붙잡은 거였다. 시동을 켜면서 볼륨을 크게 올린 걸 잊은 채 창문을 열어두었던 것이다.

한 때는 모든 남자의 연인이었던 여가수의 애절한 사랑 노래가 들리자 반가워서 몇 번을 돌아본 것이다. 잊고 있던 옛 연인을 만난 듯 절로 발걸음을 붙들었던 것을.

아아, 연한 분칠이라도 할 걸 하고 후회하던 나는 휘발되고, 그리운 사랑노래만 남아 봄날 남자를 유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꿈같은 봄날,

처음 그대를 만난 날부터

나는 알게 되었어요.

사랑의 기쁨과 슬픔

봄이라서 잎도 나고, 봄이라서 꽃도 피고, 봄이라서 착각도 하고, 봄이라서, 봄이라서.

마치 모든 죄가 사면될 것 같은 부푼 봄이다. 마을로 모여 든 사방 꽃소식이 겨우내내 담장 안에서 지루했던 나무들을 홀리고, 빛바랜 추억 속 노래도 낯선 남자의 컴컴한 귓속을 꽃처럼 향기롭게 밝힌다.

노루꼬리만큼 짧았던 내 착각도 아지랑이 속에서 아질아질 봄인양 혼곤하다. 내일은 골목마다 꽃 수가 더 늘어날 거다. 꽃 골목 어디에서 또 길을 잃고 설렐지 모르겠다.

지금은 봄 속,  일부러라도 길을 잃고 싶은 향기로운 때이다. 조 희 양(수필가 및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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