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군을 아십니까"
"울주군을 아십니까"
  • 최종두
  • 승인 2013.04.25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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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와 현대 인물

울산이 정명 600년을 맞는다. 울산광역시가 일찌감치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시민들이 기대에 부풀어 다시 한 번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울산을 이야기 하면서 울주를 빼놓을 수 없다. 600년에 비해 울주는 1000년이란 정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먼저 울산의 약사(略史)부터 알아보기로 한다.울산은 삼한(三韓)시대 진한 땅의 굴아화촌 이었다. 신라 제5대 파사왕(서기 80-111)이 굴아화현을 두었다. 제35대 경덕왕(서기 757)에 이르러 이름을 하곡(河曲)이라 고치고는 지금의 경주시 모화지방인 임관군의 영현으로서 삼았다.

▲ 최종두 고문

그러다가 고려 태조 때 고을사람인 박윤웅(朴允雄)이 큰 공을 세움으로서 하곡현에다 지금의 울산시 북구 강동면 일대를 포함시켜 뒤에 공화현으로 만들었다. 그 후 다시 양산시 웅상면 일대를 합쳐 흥려부라 부르다가 제8대 현종 9년(서기 1014)에 울주군 울주로 개편하여 기장과 동래현까지 속하게 했다.

 

이 당시 울주는 지금의 울산광역시외에 부산의 동래현을 속하게 하였으니 실로 큰 고을이었다. 방어사를 두게 된 명실 공히 큰 도시였다. 그러고 보면 울주군은 역사적으로 어쩌면 울산을 상징하는 고을인 셈이다. 그 사실은 지금 언양을 보아 쉬이 알 수 있다. 언양은 신라의 거지화현이었다.

경덕왕16년(서기 747) 울산 남쪽의 현치를 옮기면서 언양(彦陽)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지금의 양산(梁山)시 양주(良州)의 영현을 두고 신라의 구량화현이었던 두동·두서지방을 언양에다 합하게 하였다.

또 고려 17대 인종(서기 1143)때 감무(監務)를 두면서 언양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인 선조 32년(서기 1599) 울산 도호부에 합속 시켰다가 광해군 4년(서기 1612)에 다시 언양현이 되었다.

고종32년(서기 1895) 임란 후 부터는 현으로 남을 수 없음에 따라 지방제도 개편으로 전국의 도를 폐지하고 23부를 두게 됨으로서 한때 동래부에 속했으며 후에 군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또 고종(서기 1896) 때 지방제도가 바뀌어 13개 도(道)가 생길 때 언양은 경상남도에 속하게 된다. 그 후 광무 6년(서기 1897)에 또다시 지방 제도가 개편될 때 경주의 남면을 언양군에 이관시켜 두동과 두서면을 두게 되었다.

1914년 일제가 지방제도를 개편하게 되었다. 이 때 울산군에 합속되어 있다가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됨으로서 지금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으로 4개 읍 8개 면이 울주군으로 남아 있다. 이상이 울산 울주의 약사이지만 한 도시나 옛 유서 깊은 고을은 대개 그 지방의 지세가 큰 영향을 미쳐 그 지방의 풍토가 되게 마련이다.

울주군의 지세는 곧 울산의 기후와 풍토가 되기 때문에 이후로는 지금의 울주에 집중하는 것이 집필의 순서일 것 같아 먼저 울주군으로 눈을 돌리면서 글을 써 나갈까 한다.

울주군은 동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있고 약간 떨어진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뻗어있어 고헌산(1033m), 가지산(1240m), 신불산(1209m)의 높은 산이 밀집해 영남 알프스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예로부터 밀양이나 청도와의 교류는 극히 미미한 편이었다.

 

 

그것은 동쪽으로는 바다가 가로막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높은 산이 가로막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높은 산들을 지척에 두고 있는 까닭으로 맑은 물이 흘러 산물이 독특할 뿐 아니라 산세에 따른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었다.

이렇게 걸출한 인물들은 대체로 언양 출신들이 많다. 언양이나 울산을 두고 현대의 큰 인물은 아무래도 전 중앙정보부장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이후락(이하 존칭생략)씨가 아닐까 한다. 그는 1924년 5월10일 울주군 웅촌면에서 태어났다.

일생동안 수많은 화려한 경력을 쌓으면서 고향 울산에 기여 한 바를 일일이 다 기록을 못할 정도로 많지마는 대략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아호를 우석(又石)이라 부른 그는 한때 월파(月波)란 아호를 쓴 적이 있었다.

 

▲ 남구 옥동에 위치한 울주군 청사.

 

울산공립농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일찍이 군문으로 들어서게 된다. 당시 중등교육을 마친 사람들이 육군사관학교나 국방경비대의 문을 많이 두드렸지만 우석은 군사 영어학교를 택하고 졸업을 했다.

그것이 영어를 활용할 수 있는 곳으로 그를 머물게 한 계기가 됐다. 미국 육군 병참학교에서 고등군사교육을 마친 그를 놓아 둘리가 없었다. 곧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어서 육군본부 정보국차장으로 있다가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게 되었다.

예편과 동시 대한공론사 이사장(일간 영자신문)일 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의장인 박정희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는 인물이 되었다. 기발한 두뇌와 순간적인 재치를 놀랍게 발휘하는 그를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발탁하게 된다.

이후락은 이때부터 권좌에 입성하게 됐고 그로인한 영향력은 실로 막강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어느 시대이던 간에 권력의 세계에는 암투가 각박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주일 한국 대사로 밀려났던 그는 당시 한·일간의 미묘한 기류와 국내의 복잡다단한 정국에 휩싸여 있던 중에서도 타고난 역량을 내보임으로서 대통령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런 그를 박정희 대통령은 요직인 중앙정보부장에 앉혔고 그것이 결국 역사의 인물로 만들게 되었다.
거듭되는 영욕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큰 짐을 도맡아 짊어졌었다. 냉전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남북의 극한적 대치상황을 없애려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수행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는 사지(死地)가 될지 모르는 평양을 향해 떠나면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청산가리를 몰래 숨겨가지고 갔다.

설마하니 남조선에서는 38선을 넘어 걸어오는 간 큰 인물이 없을 것이라 하고 있었던 김일성은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이 나타나자 놀라며 “동무! 이후락 선생! 선생은 영웅이오!”하고는 7.4공동성명을 남북이 동시에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락은 이와 같이 나라를 위해 또 전쟁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사(國事))를 처리해 넘겼다. 그러나 3선 개헌, 10월 유신 등으로 어쩌면 몰락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고향 울산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더라도 울산에서 언양 인터체인지가 있는 곳까지는 거리상으로 멀어 불편을 느끼게 될 것임을 미리 예측하고 당초 계획에 없던 울산 언양 고속도로를 만들게 했는가 하면 학교법인 울산공업학원 이사장으로 오늘의 울산대학교를 있게 하고 또 학교법인 울산육영회 이사장으로 울산의 육영사업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밖에도 한국기원총재, 마을문고이사장,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이사장, 남북조절 위원장, 대한불교 조계종 신도 회장을 역임했고 대통령 특사로 독일과 미국을 방문하고 동남아 4개국을 친선방문 하면서 국익 외교를 펼친바 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울산으로서는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큰 인물이었다. 다음은 다시 언양읍의 현대 인물들을 알아보자./최종두(,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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