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의 '다방열전'
정은영의 '다방열전'
  • 정은영기자
  • 승인 2013.04.2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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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다방

▲ 전신전화국거리, 목신의 청춘들이 이거리를 누볐다.
근래 기온이 천방지축이다. 엊그제는 에어컨을, 오늘은 히터를 가동해야 했다. 종잡을 수 없는 기온 탓에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제법 많다.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봄옷을 입었는데 종종걸음이다. 춥다는 표현인 것 같다.

4월 중순, 가지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태화강을 타고 도심을 휘둘러간다. 으스스한 기운이 무서운 영화를 본 것처럼 전신을 휘감는다. 오늘 아침에는 비 까지 내렸다. 이미 철거해버린 난로 생각이 간절하다.
목신 다방을 찾아가기로 한 날, 오래 전 기억을 더듬어 노래 한 곡을 찾아냈다. 오늘처럼 날이 흐리고 가슴 시린 날 제격 일 것 같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1980년 5월 신곡으로 산울림이 부른 ‘찻잔’이라는 노래 1절이다. 따뜻한 커피 한잔에 사랑도 청춘도 모두 타서 마셔 버렸던 그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찻잔’을 웅얼거리면서 목신 다방의 자욱했던 담배연기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울산극장이 있었던 곳, 목신에서 나오면 바로 만나는 곳이다. 지금은 DVD극장으로 바뀌었다

잔뜩 흐린 날, 울산시 중구 성남동 울산중부소방서 서편 3층 건물 지하에 있었던 목신다방을 찾아갔다. 역시 사라져버린 도심의 다방들처럼 목신 다방은 흔적조차 없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인근 청자다방이나 맥심다방 등 잘 나가던 음악다방 틈새에서 커피만 팔았던 목신다방은 나름 손님들이 꽤 많았다.

이름이 특이했음도 한몫을 했는지 모른다. 추측하건데 당시는 박완서의 나목이란 소설이 1976년 열화당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였을 때다.

당시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요즘말로 중요 아이콘은 문학이었다. 영화도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대중가요 역시 시(詩)에 곡을 붙인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1972년 최인호가 쓴 소설 ‘별들의 고향’이 베스트셀러로 서점가를 휩쓸면서 영화로 만들어졌고 영화가 원작소설만큼 인기를 끌었다.

신성일이 “경아” 하고 불렀던 영화의 한 대목이 화제가 됐고 이 바람을 타고 전국의 주점들이 ‘별들의 고향’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아마 목신 다방의 주인도 청춘들이 몰려드는 이 거리에 다방을 내면서 간판에 ‘목신’이라는 당시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상호를 내걸었던 것 같다.

목신다방은 울산중부소방서에서 천도극장과 로얄호텔이 있는 태화강 방향 나들목 첫 번째 건물 지하였다. 1층은 송암 약국이 있었고 2층은 경양식으로 유명했던 ‘다다’가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빈약 했던 시절, 다다 경양식은 계란말이 오모라이스로 손님을 끌었고 지하 목신 다방에서 올라온 청춘들의 쉼터 역할을 했다. 다다에서 내려다보는 사거리 코너는 화려했다.

생각하건데 다방 목신은 이마가 부딪힐 만큼 입구 천정이 낮았다. 다방에 들어서면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은 자칫 이웃 테이블의 엽차를 쏟을 수도 있을 만큼 비좁았다. 이곳을 자주 찾았던 사람들은 엉덩이를 비틀며 겨우 자리를 잡아야 했던 곳으로 목신 다방을 기억하고 있다.

▲다방으로 들어서는 입구 계단, 목신다방은 사진관으로 바뀌었다. 지하가 목신다방이다. 2층은 다다 경양식집이 유명했다.

그 때, 목신다방은 지하여서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났고 헬리콥터 날개처럼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천장을 뒤덮은 담배연기는 늘 자욱했다. 또 목신 다방은 여성들이 담배를 피우는 도심 내 공간이었다.

추웠던 겨울 어느 날로 기억된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목신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진한 속눈썹을 한 여성이 다방에 들어섰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옆 테이블에 앉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진한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 그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개비는 빨아들일 때 마다 시뻘건 불을 토했다. 아무 말도 못했다. 남자의 자존심이 구겨졌던 목신 다방은 지금 사진관 간판이 화려하다. 1층 코너 송암 약국도 오래전 간판을 바꾸었다. 맞은편 울산극장은 수시로 간판을 바꿔 달더니 지금은 DVD영화관으로 간판이 화려하다. 울산극장 맞은 편 두발로 양화점도 어느 날 바람처럼 흔적을 감추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흘러서 여기 까지 왔다. 목신다방을 찾았던 그 나이들이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다. 목신다방은 음악을 즐기지 않고 오직 커피를 마시거나 누구를 만나기 위해 들르는 다방으로는 제법 알려졌던 곳이다.

목신 다방에서 나오면 바로 맞은편 지금의 먹자골목이 그때는 울산이 공단 도시임을 강조하듯 전국 각 시와 군 명칭이 붙은 술집들이 즐비했다. 창녕집도 있었고 논산집도 있었다. 이곳에는 술을 따르는 여자들이 있었고 오갈 데 없는 청춘들이 장구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주머니를 털렸던 곳이다.

▲사거리 북쪽 코너를 차지한 울산중부소방서, 그때도 소방서는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질주했다

그 때는 모두가 외로웠던 시절. 돈을 벌기 위해 객지로 나돌면서 타향에서의 회포를 풀기위해 가끔 찾는 술집이었지만 그 곳에도 풋사랑 같은 만남이 있었고 술집주인 몰래 도망 나온 아가씨와 커피 한잔으로 사랑을 확인했던 곳이 목신다방이다.

목신 다방은 일요일에 많이 붐볐다. 당시로서는 울산에서 유명했던 전신전화국 맞은 편 4층 건물, 동원예식장 덕분이었다. 또 목신다방은 천도극장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이면 청춘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고 영화가 끝나면 밀물처럼 밀려들었던 청춘들로 인해 그 시절 늘 북적됐다.

이제는 빛바랜 앨범으로 남은 목신 다방, 그 시절을 살았던 청춘들에게 목신다방은 추억의 여백에 남은 그리움이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서슬 퍼렇다. 블랙커피 한잔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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