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의 다방열전
정은영의 다방열전
  • 정은영기자
  • 승인 2013.05.09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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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다방
▲ 명 다방에서 본 시내 거리 풍경, 2차선 도로를 차량들이 빼곡이 메우며 지나간다. 그 때는 사람들이 이렇게 거리를 메우며 지나갔다.

사월초파일을 앞두고 울산지역 주요 간선도로에 연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팔각등, 연꽃등, 수박등, 주름등이 고루 내걸린 도심 풍경은 황홀하다. 부처님의 대자대비가 빛으로 사바세상을 밝히고 있음이다.

오늘 소개하는 다방은 좀 특이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매주 수요일 울산불교청년회 회원들이 해남사 수요법회를 마치고 행사 뒷마무리를 위해 꼭 찾았던 명 다방이다.

통도사 울산 포교당인 해남사는 북정공원(구 경찰서)과 울산초등학교 사이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기상대와 인접한 곳에 있다. 이곳에서 시내로 내려오다 보면 경찰서가 나오고 중앙동 주민자치센터를 살짝 지나면 맞은편에 농협, 그리고 접한 건물의 지하에 명 다방이 있었다.

명 다방은 실내가 제법 넓었다. 해남사 울산불교 청년회 회원들이 부서별 모임을 자주 이곳에서 가졌다. 그 때는 조계종 울산불교 신도회 어른들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최근 타계한 고원준회장도 울산불교청년회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명 다방은 경찰서에서는 한발 떨어진 곳이지만 농협에 돈 빌리러 온 사람들에게는 여유 있게 기다려도 되는 넉넉한 공간이었다. 그 시절, 어느 다방이나 비슷했지만 엽차 인심은 후했다. 돈 빌리는 입장은 늘 속이 탔다. 농협 직원이 와서 “됐다”는 말이 떨어지기 전에는 가슴이 조마조마 했고 엽차가 죽어났다.

명 다방은 불우이웃돕기 찻집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도심에서 살짝 벗어났다는 이유로 임대비용이 저렴해서 울산불교청년회 회원들이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여는 자선행사는 백퍼센트가 명 다방이었다. 명 다방에서 쟁반을 들고 커피를 나르던 친구들은 지금 모두 50대 중반을 넘었다.

▲ 이 건물 지하에 명다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천사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울산불교청년회를 창립했고 울불청 선배로서 신도회와 청년회간에 가교역할을 맡아 했던 영원한 청년 오태룡(66)씨는 명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후배들과 노닥거렸던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회상한다.

오 선배에게 전화기로 집 주소를 찍어 달라고 했더니 웃는다. “아차” 싶었다. 그는 전화 문자사용도 할 줄 모르고 컴퓨터는 켤 줄도 모른다. 그리고 운전면허증도 없는 사람이다.

자칭 국보급 문화재다. 그에게 당시 명 다방 마담에 대해 물었더니 “아무리 명 다방에 자주 갔다고 해도 마담까지는…”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그가 여운으로 남긴 못 다한 말 또 한 지금은 그리운 추억일 것 같다.

명 다방은 젊은 청춘들이 즐겨 찾는 공간에서는 살짝 비켜났다. 중년 세대들이 대부분 명 다방 단골이었다. 그들은 어두컴컴한 불빛아래서 바둑을 두기도 했고 한쪽 구석에서는 심심풀이 화투를 치는 손님들도 있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커피내기 화투를 치다가 다투기도 했고 삐쳐서 화투판을 뒤엎어놓고 나가버렸던 사람을 붙잡는다고 마담이 뛰어나갔던 출입구 계단은 지금 ‘천사의 집’ 간판이 붙어 있었다. 사단법인 천사운동 울산본부가 입주해 또 다른 사회봉사활동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1980년대 초, 명 다방 흔적을 아는지 물었더니 그 때는 먹고살기 바빠서 다방 갈 꿈도 못 꾸었다고 했다. 열심히 앞만 보고 산 덕분에 그는 지금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농협 옆에 있는 구두 수리 센터를 찾았다. 주인 역시 모른다고 했다. 아쉬웠다.

그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거의 없다. 그 시절, 울불청 회원으로 활동했던 박병철씨(53)에게 당시 명 다방의 풍경을 물었다. 그는 신이 났다. 명 다방 이야기만 물었는데 함께 활동했던 울산불교청년회 회원들의 최근 근황까지도 알려 주었다. 그 때 명 다방에서 만났던 법우들 가운데 4~5명이 입산출가 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 양정동 정문 앞 점포에서 전통 꿀과 다양한 건강식품 매장을 운영했던 박모씨(55)도 십 수 년 전 출가해 최근 울산에 왔었다고 했다. 그도 명 다방을 찾았을까. 찾았다면 흔적도 없는 명 다방의 추억을 들추면서 마음 아파하지는 않을까, 괜스레 마음이 저려온다.

돌아보면 이미 모든 것은 농익은 살구처럼 추억이 됐다. “아, 옛날이여” 하며 그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 때 그 사람들과 모임이라도 만들고 싶어 했다. 몇 사람에게 더 전화를 했다. 명 다방을 잊지 못하고 함께 차를 나눴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해내고는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다.

누구였지. 그때 교화부 차장을 했던 누구 아입니까. 세상은 좁다. 기억하건데 명 다방은 중구 구 시가지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 퇴락한 건물에 걸린 간판 이름이 예쁘다. 이곳에 가면 손안에 쏙 들어오는 노리개라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들러보고 싶은 곳이다.

해남사에 갔다가 커피 생각이 나서 명 다방에 가면 아는 얼굴을 만났던 시절, 지금 남산사 주지 스님이 그 때 해남사 주지스님이었다. 법문을 청하면 늘 여유로움으로 청년들에게 부모은중경을 설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이런 저런 추억을 더듬으며 명 다방 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몇 번을 지나쳐도 보이지 않던 옛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농협에서 동헌으로 가는 길 양옆 건물들이 퇴락한 채 빛바랜 페인트로 분칠한 모습이다.
여태 이 건물들은 여기서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욕심을 내 하찮은 건물이라고 치부해 버렸기 때문에 보지 못했을 뿐이다. 깨져서 때우고 바람에 날아갈까 헌 타이어로 눌러놓은 슬레이트 지붕 건물이 줄을 지어 다닥다닥 이마를 맞대고 있다. 그곳에는 문화인쇄사도 있고 연화공방도 있다. 호산필 ‘죽림칠현’ 간판을 단 문필방도 이 거리의 역사가 되고 있었다.

근래 들어 이 거리는 돼지국밥집이 늘어나고 있다. 간판이 여러 개 보인다. 슈퍼마켓도 있다. 중앙동 주민자치센터 건물 앞에서 도심 방향을 쳐다봤다. 저 멀리 울산 중부소방서에서 소방차가 굉음을 울리며 시가지를 벗어나고 있다. 또 어디서 불이 난 것일까.

명 다방에서 북적이는 도심 까지는 가깝다. 한 마디로 모서리를 돌면 된다. 시계탑 사거리 까지도 5분이 안 걸린다. 그러나 명 다방이 있었던 골목은 아직 사람들의 걸음이 드물다.

동헌에서 지난 4월부터 오는 10월까지 매주 금요일 ‘금요문화마당’을 연다고 한다.사람들이 몰려들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너무 진하지 않은 커피를 내 놨던 명 다방은 없다. 쉴 곳은 문화의 거리로 가야 한다.

기억해보면 명 다방은 걷는데 익숙했던 청춘들이 길거리를 떠돌며 들은 전설을 주워 담는 속 깊은 봉지였다. 명 다방 앞을 어정거리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 쳐다봤고 체면 없는 여우비가 또 찔끔 거렸다.

그 시절, 초파일을 앞둔 이맘때가 되면 형형색색 고운 물을 들인 습자지로 연등을 만드느라 울불청 회원들의 엄지와 검지는 연분홍빛이 더해진 포르스럼한 물이 들었다.

7080 세대들에게 명 다방은 아름다운 시절 추억의 곳간이었다.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 같던 사람들, 그러나 모두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함께 있어도 외롭다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명 다방을 떠 올리면 그리움이 창호지에 먹물처럼 스며든다. 명 다방과 함께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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