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의 다방열전
정은영의 다방열전
  • 정은영기자
  • 승인 2013.05.14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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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르 다방

반소매 차림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늦봄과 초여름이 겹쳐지는 계절이다. 엊그제 울산은 한낮에 섭씨 23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 정도 기온이라면 당연히 반소매 옷을 입어야 한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찾아온 아들은 아직 외투를 입고 있다. 계절이 가는 줄도 모르는가 싶어서 외투를 젖혀보니 털 안감은 떼놓은 상태다. 옛날 예나르 다방은 월성다방 골목 안에 있었다.

울산목욕탕이 월성다방 맞은편에 있었고 울산목욕탕의 그 끝자락에 예나르 다방(구 신화다방)이 있었다. 예나르는 무슨 뜻일까. 인터넷을 검색했다. 예나르는 옛날이라는 뜻의 예전 우리말이라고 한다. 추억이나 그리움이라는 순 우리말로도 뜻이 통한다고 한다. 정감 넘치는 말이다.

7080세대들에게 예나르 다방은 잘 알려져 있다. 아직도 예나르 다방의 전신인 신화다방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예나르 하면 당시 인기 DJ 정대석과 이상문을 기억하고 있다. 이들이 뮤직박스를 휘어잡고 있던 시절,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혼돈의 시절이었다.

1980년대 초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일간 신문들이 1도 1사 신문으로 개편되면서 해직된 기자들이 넘쳤던 시절,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음악다방들도 퇴폐문화의 공간으로 된서리를 맞게 됐다.

이 같은 냉소적 사회분위기는 젊은이들에게 정신적 방황을 하게 했고 이는 더 나아가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계몽적 성격을 띠게 됐다.

그들이 자주 모였던 공간으로 유일하게 다방이 전부였다. 히피족으로 불리면서 경찰의 장발단속 대상이던 젊은이들은 음악다방에서 비틀즈 음악을 들으며 자유를 외쳤다.

예나르는 청자 다방이나 월성 다방 처럼 음악다방으로 잘 알려진 곳은 아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이 다방이 얼마나 죽치기 편한 곳이었던가를 안다. 지금은 인터넷 게임장이 우뚝하다.

게임장 간판이 붙은 2층 건물 전부가 예나르 다방이었다. 출출하면 먹자골목에 내려가 순대나 호떡을 사서 다방 레지도 한 개, 마담도 한 개, 그리고 아는 얼굴을 몰라도 옆자리 손님에게도 나눠주고 뮤직박스DJ에게 까지 주고 돌아서면 신청했던 음악이 졸졸졸 뒤를 따라 테이블까지 왔었다.

호떡 한 개에 신청곡 순서가 바뀌기도 했던 그 때를 우리는 지금 못내 그리워한다. 정에 굶주린 청춘들에게 가혹했던 세월은 이미 역사의 강으로 흘렀고 그 시절을 열심히 살았던 7080세대들도 서서히 현재의 위치에서 짐을 내려놓고 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온다고 말했지
노래하는 제비처럼
언덕에 올라 보면
지저귀는 즐거운 노래 소리
꽃이 피는 봄을 알리네

가수 윤승희가 부른 ‘제비처럼’의 노랫말 일부다. 7080 세대들이 무지무지 불렀던 노래다. 계절의 봄이 아니라 그 때는 암울했던 인생의 봄을 모두들 기다렸다. 시골서 젊음을 밑천으로 울산에 온 청춘들은 이 노래에 성공 신화를 걸었다. 무일푼으로 울산에 와서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았던 청춘들이다. 그들에게 이 노래는 남다른 감회를 준다.

예나르는 일주일간 열심히 일한 이들이 시내에 나오면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대표적 공간이었다. 음악도 인근 미도다방에 비해 고급스럽지 않아서 괜찮았고 더더욱 좋았던 것은 마담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었다.

최근 예나르 다방이 있었던 골목 끝자락은 전통 죽 시장인 옥골시장이 새로 단장해 문을 열었다. 죽으로 유명한 골목. 옥골시장은 예나르 다방 단골들이 싸고 맛있다는 이유로 단골이 됐다. 예나르를 찾아간 5월 초순 어느 초저녁의 먹자골목, 포장마차 덮게도 서커스단의 천막처럼 휘황찬란하다. 골목상권 특화로 인해 리어카 행상의 길거리 음식이 먹을 만하다.

그 시절 리어카 포장마차는 카바이드 덩어리를 깡통에 담아 물을 붓고 덮개를 한 후 작은 구멍을 뚫어 새어 나오는 가스에 불을 밝힌 일명 칸델라등불을 켠 채 영업했다. 바람이 불면 일렁이는 칸델라 불은 꺼질듯 하면서도 용하게 되살아났고 신기해서 한 참을 보다 왔던 기억들이 새롭다.

그 때는 잔술을 팔았고 담배도 한 개비씩 팔았다. 우리는 한 개비가 아니라 ‘담배 한 까치’ 라 했고 한 까치 씩 판다고 해서 ‘까치 담배’로 불렀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했던 포장마차, 그러나 수년전부터 먹자골목은 골목 전부를 덮개로 덮어서 비가와도 비를 맞지 않는 곳이 됐다. 옛날로 치면 천지개벽을 했다. 그러나 추억 속에 자리한 다방 예나르는 없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울산 목욕탕도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그냥 표 나지 않게 그대로인양 영업을 하는 곳은 포장마차뿐이다. 골목 들머리 호떡을 굽는 할머니가 그나마 유일하게 울산 목욕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예나르 다방도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때 이야기가 전설 같다.

할머니는 이 골목, 이 자리에서 40여년을 장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 개 500원 하는 호떡은 영락없는 그 시절 그 맛이다. 이런 호떡은 명품지정을 받을 수 없을까, 할머니가 이 골목에서 사라진다면 또 한 개의 호떡 같이 귀한 추억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할머니는 오후 7시가 조금 넘으면 포장마차 천막을 내린다고 한다. 힘에 부대껴서 옛날처럼 밤 10시 까지 영업할 수가 없어서다.

다시 한 번 예나르 다방을 올려다봤다. 스멀스멀 추억들이 건물 난간을 타고 다닌다. 그 시절, 울산에서 최신식 상가로 지어진 예나르 맞은편 진흥상가의 불빛이 흐물흐물하다. 현재는 재래시장의 운명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동행한 홍대식씨는 옥골시장을 지나서 중앙시장을 마주한 상가골목을 돌아 나오다 한 건물을 쳐다보며 “옛날에 우리 점포가 여기 있었지요, 이모님 점포는 아직도 있을 겁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코미디언 고 배삼룡씨가 지은 상가 건물 옆이었다. 지금은 가방 전문점이 입주해 있고 각종 액세서리 점포들이 입주해 있었지만 분위기는 썰렁했다. ‘무상한 세월, 무심한 세월’이다.

1--시내 도로는 지금 이팝꽃 대궐이다.
2--예나르 다방 맞은편 진흥상가, 반듯한 간판이 화려했던 옛 영광을 보여주는 듯 하다.
3--예나르 다방이 있었던 건물, 추억은 소리없이 창가를 흐른다.
4-예나르다방 인근은 울산 최고의 먹자골목이다. 죽시장으로 유명한 옥골시장이 새로 개장했다.
5-예나르다방, 옛날 신화다방, 현재는 오락실로 간판이 또 바뀌었다. 예나르다방으로 오르던 계단에는 인근 시장 사람들이 갖다놓은 보따리들이 즐비하다.
6---옛 예나르 다방 골목을 나서 큰 도로를 만나면 이팝꽃이 쌀밥처럼 화사하다.
7---옛날 예나르 다방 입구, 아련한 추억의 다방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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