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의 다방열전
정은영의 다방열전
  • 정은영기자
  • 승인 2013.05.2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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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 다방

▲ 2---3층 건물 2층에 미도다방과 미도그릴이 있었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월 중순, 한낮 기온이 섭씨 30도 까지 치솟았다. 기온으로는 한 여름이다. 전신에 힘이 쑥 빠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며칠 전 비가 내려서 하늘은 더없이 맑다.

도심 거리는 미인들의 미니스커트가 점령을 마무리했다. 하이힐 샌들을 신은 아가씨들의 활보가 7080 세대들의 기를 팍팍 죽인다.

시계탑 주변 도로에 간신히 개구리 주차를 하면서 보니 도심 간판들이 가지런하다. 울산시가 간판크기 등을 정해 설치토록 하면서 깔끔해졌지만 규격화된 간판은 간판 본래의 뜻을 훼손하는 것 같다. 자질구레한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간 미도다방, 흔적은 사라졌지만 건물은 옛 그대로다.

옥교동 농협 건너편에서 마주보면 3층 건물의 2층에 미도 다방이 있었다. 이 다방은 클래식 음악으로 유명해졌다. 경양식 레스토랑인 미도그릴과 함께 같은 층에서 영업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도그릴과 미도다방을 확실히 구분하지 못했다.

미도 다방은 인근 월성다방이나 청자다방처럼 대중음악 중심의 음악다방과는 달리 품위를 생명으로 한 클래식 음악다방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번화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늘 서성대는 청춘들로 북적였다.

1층 다방 들머리는 덕하, 입실 등에서 학성동 구 울산역을 이용해 보따리 농산물을 이고 지고 온 시골 할머니들이 전을 펼쳤다. 기억 하건데 찐쌀을 파는 할머니, 시금치와 파, 곶감이나 감, 계절마다 나오는 농산물을 소쿠리에 담아 전을 펼쳤다.

미도 다방이 있었던 거리, 가로수로 심어진 이 팝 꽃이 만개했다. 이 팝 꽃은 엊그제 소나기처럼 퍼부은 비에도 꿈쩍 않고 화려한 꽃 대궐을 연출했다. 미도다방, 미도그릴은 7080 세대들이 청춘이었을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 시내버스가 시계탑 거리를 왕복차선으로 운행할 때 울산의 중심지였다.

주변 점포는 지금도 몇 군데 남아있지만 예물시계와 금반지를 진열한 보석점이 줄을 이었고 시계탑 사거리로 향하는 곳곳은 별표전축 대리점과 LP판을 전시한 레코드 가게들이 성업했다.

기성복 보다는 맞춤양복이 대세였을 때 미도 다방 주변은 라디오 광고에 등장하는 유명 양복점들도 많았다. 지금은 골프대회 우승 선수들이 그린재킷을 입는다. 그 때는 그린 골덴텍스 가운데 골이 큰 원단으로 콤비를 맞췄던 사람들이 우쭐해 했던 시절이다.

미도 다방을 들락거렸던 사람들은 수준급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이었다. 대중음악을 즐기는 부류들은 미도다방에 들어가서 오래 견디지 못했다. 미도 다방 단골들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 어찌 보면 고급 인간들이었다.

지금도 미도 다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으면 하이칼라 급 지식인이었고 이 다방을 모르면 블루칼라가 틀림없다고 보면 된다. 하이칼라와 블루칼라를 나누는 잣대로도 미도 다방은 그 역할을 했다. 당시로서는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호사를 누리는 것처럼 인식됐던 시절이었다.

▲ 1----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터널에 들어서는 기분이 들게 한다.

현장에서 일하던 기능직 사원들의 호칭이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공돌이와 공순이가 미도 다방에서 사랑을 나누기는 쉽지 않았다. 음악이 수준에 맞지 않았다. 공돌이와 공순이들은 신중현과 엽전들이 부른 ‘미인’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한창 히트하는 대중가요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공돌이와 공순이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들이 한꺼번에 방송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맞게 된다. 1975년 8월 ‘미인’을 비롯해 수많은 대중가요들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반열에 올랐고 갈 곳을 잃어버린 트롯가요팬들은 시대적 상황과 함께 정신적 공허감에 몸부림 쳤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는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엄청난 혼란기였다. 정치 불안으로 야기된 경제적 혼란은 돈의 가치를 하루가 다르게 낮추고 있었다. 어제 사놓은 등산용 텐트가 오늘은 30% 이상 가격이 폭등했을 만큼 쩐의 가치 변동이 심했다. 그때는 외상으로 사놓기만 해도 올랐다. 물가는 가히 살인적으로 폭등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자동차 생산 5위국이다. 그 시절은 차가 팔리지 않아서 공돌이와 공순이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계열사로 이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일 직장을 떠나는 동료들을 송별하느라 직장 근처 음식점에서는 젓가락 장단이 끊이질 않았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꿈을 꾸면서 찾아온 울산에서 청춘들은 좌절했지만 그래도 이들을 정신적으로 붙잡은 곳이 영화관과 음악다방이었다. 청춘들은 대중음악에 열광했다. 일부 고상한 음악을 듣고자 했던 청춘들이 미도 다방을 찾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세상과의 새로운 만남을 이어나갈 준비를 했던 것이다.

미도 다방은 입구에서부터 분위기가 밝지는 않았다. 계단 자체가 다른 2층 건물들과는 다르게 약간 삐딱했고 터널 같았다. 전구가 불을 밝혔지만 한낮에도 2층 나무 계단은 어두컴컴했다.

건물이 북향이라서 다방 내부는 어두웠다. 상영 중인 극장에 들어서는 기분 같은, 그런 것이었다. 대신 실내 분위기는 고풍스러웠다. 테이블을 비롯해 인테리어도 유럽풍으로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클래식 분위기에 걸 맞는다고 하면 맞다.

이 다방은 클래식 고전 음악 공간으로 울산에서 유일했다. 트롯 LP판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 이 다방에는 유명 클래식 음반들이 무수히 많았다. 한쪽 벽면을 가득히 메운 LP판들은 다방 폐업과 함께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아쉽다. 울산 클래식음악의 한 축이 미도다방 폐업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린 아쉬움이 크다.

누군가는 지금도 미도 다방 분위기를 떠올리며 젊은 날 아름다웠던 추억에 젖을 것 같다. 미도 다방의 뮤직 박스에서 들려주는 ‘다뉴브 강의 물결’은 아직도 7080 청춘들의 뇌리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데, 꿈을 깨듯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니 미도 다방 간판이 붙었던 곳에 노래방 간판이 떠억 버티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주변이다. 함태기에 호박잎과 정구지를 담은 할머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때의 기억들은 묵은 된장 같은 추억이 됐고 미도 다방을 들락거렸던 청춘들도 희끗한 머리칼로 겨우 추억을 되새김질 할 뿐이다.

그 시절, 미도 다방을 찾았던 청춘들은 무얼 하며 지낼까. 직장에서 이미 떠났거나 떠날 준비에 골몰하고 있겠지. 봄인지 여름인지 분간이 쉽지 않은 화창한 날, 갈만한 곳도 마땅찮다.

미도 다방의 쌉싸래한 커피 향이 혀끝을 맴돈다. 지금 이 순간도 내일이면 벌써 추억이다. 길 가는 아가씨에게 누가 전화를 했나 보다. 컬러링이 신중현의 ‘미인’이다. 우연한 곳에서 그 시절 노래를 듣는 기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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