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의 다방열전
정은영의 다방열전
  • 정은영
  • 승인 2013.06.1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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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다방

▲황금다방 입구에서 시계탑방향의 도심거리, 수십년간 도심거리를 지켜왔던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언젠가부터 이팝나무로 교체됐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산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입에 익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옛날 방송국 공개홀이기도 했던 황금 다방을 찾아 나섰다. 날씨는 모처럼 남색으로 쾌청하다.

황금 다방은 시계탑 사거리에서 우정동 방향 경남은행에서 70여m쯤에 있었던 지하 다방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울산에서 내과 전문의로 명성을 얻었던 성남동 김진수 내과(김 내과)의원 옆이다. 울산 최고 양복점으로 명성을 얻었던 국정사도 이웃이다.

황금 다방은 이름이 고급스럽고 부티가 난다. 방송 녹화가 없는 날은 조용했다. 그러나 방송국 공개홀로 이용되는 바람에 녹화가 잇는 날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수 지망생들이 이곳에서 열린 방송국 가요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가수가 되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을 간 사람이 가수 설운도씨다.

황금다방은 건물 내부가 좀 복잡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도로에서 건물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별도로 있었다. 다방은 지하에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2층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해프닝을 벌였다. 입구도 그 당시로는 돈을 좀 들인 파격적 단장으로 유명했다.

황금 다방은 시화전이나 아마추어 노래 콩쿠르가 단골로 열렸던 곳이다. 대학생들의 불우이웃돕기 자선 찻집 운영도 많았다. 올해로 가수 데뷔 30년이라는 설운도 역시 앞에서 밝혔듯이 이 다방에서 열린 아마추어 노래콩쿠르에서 ‘이영춘’이라는 본명으로 출전해 대상을 받으면서 가요계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대부분 구전되는 이야기로 신빙성이 없다. 어찌됐건 간에 설운도라는 사람이 이곳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설운도는 그 때부터 인기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날 그에게 기회가 왔다. 사할린 동포들의 귀국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을 때, 설운도는 이들의 삶을 주제로 한 ‘잃어버린 30년’을 불렀다. 대박이 났다. 살다가 이런 운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설운도는 재수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 뒤부터 울산 노래자랑 콩쿠르 하면 설운도의 이야기가 전설로 둔갑했다.

이 골목같은 미로가 황금다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출입구다. 그 시절, 미로골목은 방송출연을 앞둔 게스트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없는 텅빈 공간, 식당 간판이 객을부른다.

7080 세대들이 청춘이던 때는 설운도 처럼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이었다. 설운도 역시 이 노래자랑에 출전했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대한민국 최고 가수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설운도 뿐만 아니라 7080 세대들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더불어 전국에 공단이 조성되면서 꿈을 꾸는 기회를 가졌고 상당수는 경제인으로 큰 성공을 이루었다.

청춘들은 누가 기름쟁이 라고 놀리던지 말든지 스스로는 세상을 다 쥔 것처럼 우쭐해 했던 시절이다. 그때 설운도 역시 그랬을 것 같다. 당시 이 노래자랑에서 상을 받은 예비 가수들이 진짜 인기가수로 꿈을 키워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시절, 황금다방은 지역 방송국에서 오프닝 프로그램으로 노래자랑 콩쿠르를 매주 정해진 시간대에 개최했다. 이날 녹화된 내용이 울산에서 방송을 탔고 이로 인해 황금다방은 울산에서 제법 유명했다. 당시는 다방내부를 홀이라고 했다. 황금 다방 홀은 다른 다방들에 비해 꽤 넓었다. 요즘으로 치면 방송 공개홀과 같은 개념이다.

황금 다방이 방송국 공개 홀로 이용되면서 자주 드나드는 청춘들이 많았다. 만남의 약속 장소로 잘 알려진 것은 순전히 공개 홀 덕분이다. 황금 다방 주변은 요즘 기준으로 봐도 울산 구시가지 중심이지만 과거에는 최고 번화가로 사람들이 들끓었다.

▲ 7080세대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구미식당과 풍전식당 간판이 옛친구를 만난듯 정겹다.

다방에서 시계탑 사거리로 오는 방향에 찌개 등으로 유명한 풍전식당과 구미식당은 울산 최고 맛 집으로 인기가 높았다. 예약 문화가 없던 그 시절, 식당 문 앞은 줄을 선 손님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황금다방 손님들도 자주 이 식당을 이용했다. 지하 다방이고 공간이 넓어서 겨울에는 좀 썰렁했었고 뜨끈한 국물 생각이 나면 이 식당이 제격이었다. 반가운 것은 황금 다방이 언제 문을 닫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들 식당은 찌개에서 회 밥으로 메뉴는 바꾸었지만 여전히 건재했다. 옛 친구를 만난 듯 식당 간판을 보고 또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세월은 참 많이 흘렀다. 함께 소주를 마셨고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던 친구들도 주말이면 친구 자녀들의 결혼식 참석으로 주머니 사정이 여유가 없다고 하소연이다. 7080 세대들이 옛날 청춘시절 아버지 어머니처럼 나이를 먹었다. 돌아보면 아련한 추억이다.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
소달구지 덜컹대던 길
시냇물이 흘러내리던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중략)

현재 방송 진행자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수 임성훈이 1977년 불러서 히트했던 ‘시골길’의 한 대목이다. 한 때는 대단한 인기를 몰고 다녔던 대중가요였다. 이 노래는 각종 경기 때마다 응원가로 많이 불렀고 대학축제에서도 단골로 등장했다.

그 시절 젊은 청춘들은 장발에다 청바지를 입는 바람에 어른들에게는 혐오감을 주기도 했지만 그들이 꾸는 꿈은 파란 하늘처럼 순수했다. 그들의 순수함이 지금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됐다고 하면 억지일까.

그들은 돈을 벌기위해 도시로 왔다. 성공을 하기위해 도시로 왔다. 무지개 꿈을 키웠던 그들이 있었다는 것은 대한민국 발전사에서 가장 큰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세대다. 최근 58년생 개띠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7080 세대의 중심인적자원이다. 이들의 땀은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했다. 이제는 그들을 사회가 돌아봐야 한다. 그들이 젊은 시절 누렸던 문화를 만들어줘야 한다. 기업으로부터 퇴출되는 그들을 위해, 갈 곳 없는 그들을 위해 사회는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엊그제 오래전 친구를 만났다. 그가 물었다. 요즘 뭐하느냐고 했다. 다시 내가 물었다. 요즘 뭘 하느냐고, 그는 우물우물 했다. 말에 자신감이 사라졌다. 지난해 말 퇴직했다고 한다. 마누라와 열심히 산에 오른다고 한다. 그것도 점차 싫증이 나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마땅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지내는 것이 돈 버는 것이라고 한마디를 던지고는 돌아섰다.

그와 헤어져서 황금 다방이 있었던 곳으로 가면서 많이 억울했다. 설웁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서서 멀거니 가는 그를 쳐다봤다. 35년 전 대학시절, 황금 다방에서 일일찻집을 열었을 때 커피 잔을 나르던 그를 간신히 떠 올렸다. 그때 그는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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