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의 다방열전
정은영의 다방열전
  • 정은영기자
  • 승인 2013.06.1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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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 다방
▲ 보세골목과 소공동 다방 건물, 창가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중구 보건소가 보였다.

지난 5월 30일 대한민국 유명 DJ 이종환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했다. 그가 진행한 프로그램 모두는 지금도 후배들에 의해 빛이 나건만 그를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비롯해 ‘밤을 잊은 그대에게’ ‘여성시대’ 등등은 그가 최고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음악다방이 성업하던 때, 이종환은 방송국 프로듀서로서 일반 DJ들과는 다르게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해 직접 진행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한창 잘 나가던 때, 울산 음악다방들도 잘 나가던 때였다.

소공동 다방을 이야기 하자면 우선 다방 이름에서 서울 냄새가 났다. 시골 촌놈들에게 서울 냄새는 매우 독특했다. 이 다방은 1980년대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몰렸다. 인근 청자다방 보다는 훨씬 늦게 출발했지만 청춘들을 모여들게 하는데 성공한 다방이다.

▲ 소공동다방에서 나오면서 바라본 왼편은 시계탑이다. 한때는 시계탑이 울산 원도심의 중심이었다.
지금의 보세골목 입구, 시계탑에서 울산교로 나오는 방향 50여m지점, 보세골목 입구 2층이다. 현재는 치과로 모습이 바뀌었지만 1980년대 그때의 소공동 다방은 청춘들이 시내 구경을 위해 찾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2층 올라가는 계단은 비좁았다. 쌍방 교행이 어려울 만큼이지만 용케도 비켜 다녔다. 그러나 2층 다방에 들어서면 거리를 내려다보는 조망이 괜찮았다. 창가에 앉으면 시계탑에서부터 울산교 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보세골목 방향으로는 멀리 울산 중구보건소가 보였다. 그래서 창가 테이블은 늘 빈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소공동 다방은 시계탑 덕분에 밤이면 상가에서 밝힌 전등불이 화려했다. 낮에 공장에서 일한 청춘들은 근무를 마치자마자 시내로 몰려 나왔다. 기름때가 낀 손톱 기름때를 벗겨내기 위해 세제를 칫솔에 묻혀서 씻어낸 청춘들이 소공동 다방에서 짝을 기다렸다.

이들의 지루함을 달래기라도 하듯 뮤직 박스 DJ는 1980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대상을 받은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중심으로 지칠 때 힘이 되는 노래들이 실내를 가득 넘쳤다.

당시 이 다방 인기 DJ는 정대석, 정은아, 김봉윤 등 이었다. 이들은 열정적으로 청춘들을 위한 음악을 골랐다. 이들이 고른 음악에 청춘들은 배고픔도 잊었다. 메모지에 적힌 노래 제목들이 뮤직 박스로 이동되는 순간부터 청춘들의 눈빛이 빛났고 노래는 살아났다.

▲ 울산교 방향, 1층 가건물들이 밀집했던 울산상권의 중심거리.
그 시절, 소공동 다방 주변은 울산 최고 번화가였다. 뉴코아 아울렛이 있는 터를 비롯해 주변은 가건물들이 많았다. 큰 건물로 우뚝 솟은 것이 청자 다방 건물이었다. 나머지는 1층과 2층 가건물들이 즐비했다.

보세골목 안은 유명 중국집을 비롯해 먹을거리가 제법 많았다. 뉴코아 아울렛과 키를 맞춘 태화극장이 제법 웅장했다. 태화극장 주변에는 산악인들이 즐겨 찾았던 코오롱 스포츠가 있었다. 1908년대 초반,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던 시절, 산악인들을 비롯해 산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거의 외상으로 장비를 구입했다.

오늘 사놓으면 내일 값이 올랐던 시절이다. 돌아보면 어찌 살았는지 싶지만 그때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진 청춘들이 사회적으로 질서를 잡아갔던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공동 다방 또한 일일찻집이 제법 열렸다. 위치가 좋았고 다방 이름에서 서울 냄새가 났던 것도 일일찻집 운영을 하는데 한몫했다. 그 당시 울산에서 서울 소공동 하면 약간은 고급 향수를 뿌린 듯 했다.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많이 찾았고 이를 알아차린 남성들이 미끼를 던졌던 추억의 다방이 소공동이다.

▲ 비좁은 계단은 그대로 남아 소공동 시절을 추억케 한다.
청춘들의 낚시터에서 만나 결혼까지 골인한 경우도 있었다. 80년대 어느 초겨울, 소공동에서 미팅을 한 그룹이 있었다. 5대5로 만난 이들은 남자들이 소지품을 꺼내놓았고 이를 줍는 여성이 남자의 파트너가 됐다.
소지품을 줍고 나면 짝을 맞춘 후 한 시간의 탐색전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모여서 고고장을 갔었다. 그 이후 아지랑이를 타고 온 봄볕이 화사한 날 미팅에서 만난 청춘 두 커플이 결혼 한다고 청첩장을 보내온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청춘들의 화제가 됐다. 미팅에서 만나 결혼하기는 쉽지 않다. 여러 결혼 커플이 있지만 당시는 기차여행 커플이 결혼까지 골인 하는 일이 많았다.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 결혼까지 골인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시내 다방에서 미팅한 청춘들이 결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은 사건이었다.

▲ 소공동 다방 건물, 추억의 소공동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낡은 건물만 남아 그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그들은 잘 살고 있다. 참으로 인연은 알 수 없다. 다방에서 5대5로 만난 청춘 가운데서 두 쌍의 부부가 탄생됐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 아닐까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사건이다. 그만큼 그 당시로는 다방 미팅이 유행했다. 이 글을 혹시 그들이 보게 된다면 우리부부를 두고 말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다방열전을 쓰기 위해 소공동 다방이 있었던 보세골목을 찾았을 때가 지난 주말 오후 1시쯤이었다. 한낮 기온이 섭씨 30도에 근접했다. 소공동 다방은 치과로 변했지만 주변은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한낮은 사람들의 통행이 뜸했다.

해가 지고 난 다음 중앙시장 할매 호떡을 사러 간다며 일부러 소공동 보세거리를 찾았다. 어둠이 거리를 가득 메운 뒤에야 눈에 불을 켠 청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쯤부터 보세 거리는 인간시장이 됐다. 소공동 다방 창가에서 이들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쏠쏠 했는데 아쉽다. 기억 저편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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