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의 다방열전
정은영의 다방열전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13.08.14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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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양정동 아름다방
▲ 1층과 2층 계단에 걸린 아름다방 간판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듭같다.

온도계가 매일 최고 온도를 갈아치우고 있다. 오늘은 입추다. 옛날 어른들도 더위에 지치다 못해 말복이 오기 전에 입추라는 절기를 만들었는가보다.

숨이 턱턱 막힌다. 이날 울산은 섭씨 38.8도로서 81년 만의 폭염 기록을 세웠다. 한낮에는 도심에 인적이 끊어졌다.

울산 남구 고사동에는 비공식으로 섭씨 40도를 기록 했다고 한다. 울산이 대구를 제치고 폭염순위 전국 1위에 올랐다고 한다. 울산 더위는 국내 뉴스 톱을 차지했다. 다방 냉커피도 오늘 같은 폭염에는 맥을 추지 못할 것 같다.

울산 북구 양정동 현대차 정문 앞 다방을 찾아가는 시간에 뉴스를 들었다. 엊그제 여름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현대자동차 노사가 협상을 시원하게 마무리하지 못하고 결렬됐다고 한다.

▲ 1970년대와 80년대 현대차 정문 주변은 울산 최고의 번화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폭염보다 더한 협상결렬 공포가 시민들에게 불안 요인으로 다가서고 있다. “노사 모두 잘 돼야 될 텐데.” 해마다 반복되는 노사 간 갈등의 해법은 없을까, 이런 저런 상념이 가득할 때 현대차 정문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려는데 한증막에 들어서는 것 같다.

울산시 북구 양정동 50번지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회사답게 웅장한 모습이다. 그러나 정문 앞 풍경은 어느 시골 읍처럼 조용하다. 한때 옥교동 도심보다 흥청 됐던 곳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60년대 말을 시작으로 현대자동차는 국내 자동차 산업의 시동을 걸었다. 현대차가 포니를 생산하면서 ‘우리 차’라는 개념을 국민의 뇌리에 심었다.

그리고 승승장구했다. 70년대 말 위기를 제외하고는 현대차가 롱런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현대자동차에 취직을 했다. 78년 입사자 사번이 5000번 이내였다. 그러나 매월 신규인력을 체용하면서 현대차 사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때가 현대차 정문 다방들이 성업하던 시기였다. 면접시간에 맞추기 위해 대기하던 사람들이 회사 인근 다방에서 정보도 얻고 시간도 보내기 위해 줄을 이어 찾아들었다. 그때 현대차 정문 신호등을 건너면 바로 문화다방이었다.

문화다방은 외벽에 흰 타일을 바른 깔끔한 건물 이었다. 그리고 84년쯤에 양정 파출소 인근 2층 건물에 ‘오렌지 향기 바람에 날리우고’ 라는 간판을 내건 다방이 눈길을 끌었다. ‘오렌지 향기 바람에 날리우고‘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을 최근 만났다.

이 다방 이름은 그가 창작한 것이 아니고 부산 광복동에서 이미 다방 이름으로 쓰여 오던 것이 생각나서 친구가 다방을 한다기에 알려준 것이라고 한다. 그 다방을 찾기 위해 염천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현대차 정문으로 갔으나 가로수가 너무 커 버렸고 주변 환경이 과거와는 다르게 변해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의 위치만 존재할 뿐이다. 파출소 인근 2층 건물들을 살펴보니 노조 관련 사무실들이 있고 나머지는 임대 현수막이 붙어있다.

▲ 아름다방은 현대차 정문 맞은편 명성화원 2층에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 같다. 70년대 현대차 정문은 늘 사람들로 바글 거렸다. 정문 건너편 조명 약국이 유명 했는데 그 역시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조명 약국을 찾으면 주변에 문화다방이나 ‘오렌지 향기 바람에 날리우고’ 라는 다방들이 어슴푸레 생각날 법도 하건만 세월의 저편으로 묻어버려야 하는 아쉬움이 크다.

양정동 일대를 돌아다녀보다가 다소 생소한 다방 한곳을 발견했다. 현대차 정문 맞은편에서 현대 힐 스테이트 아파트 방향으로 50여 m를 오다보면 2층에 아름 다방이 있다. 양정동 전부를 뒤져서 찾은 유일한 다방이다. 다방을 찾는 입장에서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개업한지가 오래됐는지 간판이 낡았다. 외부에서 보면 커피 전문점처럼 깔끔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다방이다. 그래도 반가워서 인근 골목에 차를 세우고 갔더니 오전 10시 쯤 인데도 철문이 닫혀 있다. 계단은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듯 시멘트 타일 그대로다.

그러나 정겹다. 7080 세대들에게는 유명 커피 전문점에 들어서는 것 보다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다. 현대차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냥 회사 앞 다방에 왔다가 간다고 했더니 웃는다.

70년대 말 부터 80년대 중반까지 필자도 현대차에 근무했다. 그때는 현대차의 이미지가 지금처럼 높지는 않았다. 수시로 석유화학 지원공단 기업체에 원서를 냈던 시절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쪽에서 현대차에 입사하기 위해 눈치를 보는 세상이 됐다.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현대차 정문 앞은 70년대와 80년대, 월급이 현금으로 지급되던 그 때는 근로자들에게 최고의 시절이었다. 월급날이 되면 오후부터 술집 마담을 비롯해 식당 주인들이 외상값을 받기위해 자동차 정문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정문 앞은 월급날을 노린 상인들이 각종 물품을 판매하는 난전을 열었다. 한 달 꼬박 일한 품값의 절반이 이날 날아갔다. 술집 마담을 피해 정문으로 나가지 않고 후문으로 나가던 사람들이 눈치 빠른 마담에게 붙잡혀서 주머니를 털리던 시절이 지금은 추억이 됐다.

미처 들키지 않고 달아나던 사람들이 안심하고 숨어들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바로 회사 앞 다방이었다. 달아난 기분을 즐기기 위해 다방 아가씨와 냉커피 한잔을 즐겼다. 그리고는 인근 당구장으로 슬슬 자리를 옮겨갔다.

▲ 글로벌 기업 현대차 본관과 정문.

추억해보면 그 당시는 월급날만 피하면 한 달 동안 외상값을 받으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처럼 카드가 없던 시절 외상은 한 시대의 결재문화였다. 그리고 회사 인근 음식점에서는 월급날 외상값을 갚으려 가면 기본으로 맥주3병과 안주를 내놨다. 외상값을 다 갚으려고 해도 항상 3분의 1 정도는 미뤄놓았다. 다 받으면 다음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던 때다.

이런 친구가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돈만 있으면 우선 다방에 갔다. 다방 아가씨 퇴근 시간에 맞춰 데이트를 했고 결국 그 아가씨와 결혼했다. 이들의 러브 스토리가 회사에 소문이 나기도 했다.

양정동에 유일하게 남은 아름 다방, 주변 환경으로 봐서 언제 없어질지 모를 일이다. 한 곳 정도는 남아 있어도 괜찮은데 장사가 안 되니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내몰리면 다방은 간판을 내리게 된다. 젊은이들이 다방을 모른다. 물어보면 뭐하는 곳인지 얼떨떨한 경우가 허다하다.

양정동에 하나 남은 다방이 사라질 때, 이 회사에서 정년 하는 7080 세대들은 입사 때의 추억을 또 한곳 잃어버리게 된다. 돌고 도는 것이 물레방아 인생이라지만 너무 빨리 세상이 바뀌는 것 같아서 겁이 난다. 내 주변에 어떤 것들이 나도 모르게 또 사라질지 알 수 없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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