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폐의 시대상
퇴폐의 시대상
  • 강경수
  • 승인 2013.08.1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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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는 ‘일소(一掃)’라는 말이 유난히 많았다. ‘남김없이 모조리 쓸어버린다’는 뜻의 이 말은 당시 혁명정부의 구호였다. 구습을 타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회악 일소’니 ‘퇴폐풍조 일소’니 하는 공약이 포고령처럼 터져나왔다.

1971년 9월 문화공보부는 ‘퇴폐풍조 일소’를 선언했다. 그 시절 문화공보부는 국가정책을 발표하고 홍보하는 창구였고,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다.

언론을 통제하고 감독하는 권한까지 가져 신문방송과 언론관계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문공부에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각종 퇴폐행위를 뿌리뽑겠다고 발표했다.

사회정화 차원이라는 빌미로 풍기와 문란의 기준까지 제 멋대로 정했다. 처벌대상은 공연이나 출판은 물론 학생들의 두발이나 옷차림도 가위질을 당했다. 그 때 생겨난 말들이 퇴폐가요니, 불온서적이니, 장발과 미니스커트였다.

그 시대를 살아온 20대는 장발이나 짧은치마 때문에 불신검문에 걸리거나 이리저리 피해다닌 경험들을 갖고 있다. 우스꽝스럽게도 이런 헤프닝도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놈 하나가 (데모도 안하고)열심히 공부한 덕에 그 어렵다는 중앙정보부에 합격했다.

합격통지서와 입교안내문을 훈장처럼 움켜쥔 그는 지리산 두메산골인 고향으로 친구 서넛을 초대했다 축배를 들기 위해서는 읍내로 가야했고, 버스를 탈려면 면 소재지 지서를 지나야 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지서 앞을 피해 가야했지만 정보부 예비요원이었던 친구놈은 주머니속의 합격증을 믿고 지서를 보무당당 지나쳤다.

지서안 순경은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발동했다. 그리고는 서랍 속 가위부터 끄집어 내 다짜고짜 그 친구놈에게 다가섰다. 장발머리였던 그 친구의 머리가 싹둑 잘려 나간 것은 일순간이었다. 말리던 일행들이 “그 친구 며칠후면 정보부에 들어갈 사람”이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산골 초등학교 교장아들이 정보부에 합격할리 없고, 정보부 운운하면 관명사칭죄로 다스리겠다”고 다그쳤다.

그러나 그 친구 정보부에 정식 발령받던 날 맨 먼저 교장선생님댁에 문안인사를 온 건 그 지역 군수와 경찰서장이었다. 승승장구한 그 친구는 이명박 정부 앞의 정권때 차관급인 안기부특보까지 지냈다.

다시 ‘일소의 70년대’로 돌아가 그 때는 ‘고고금지령’까지 등장한 적이 있었다. 카바레나 나이트클럽에서 고고춤이 유행하자 문공부는 퇴폐행위의 극치라며 단속을 검토한 바 있었다. 경찰도 지금의 경범죄를 적용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충성경쟁이라도 하듯 이번에는 서울시까지 나서 식품위생법을 손질해 고고춤을 막겠다고 설쳐댔다.

결국 시비는 시비로 끝나 고고춤은 무사했다. 생각하면 턱없는 짓들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1976년 쯤인가에는 ‘거리의 포옹이나 입맞춤’을 놓고도 논란이 됐다. 전통적 미풍을 해치는 음란행위라며 경찰은 형법으로 단속하겠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요즘에 와서 ‘길거리 포옹과 키스’가 경범죄에 해당된다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태반은 전과자가 되고 말일이다.

최근 경찰청이 ‘2013년판 경범죄 처벌법 해석서’를 내놔 눈길을 끌고 있다. 그중 몇 개 조항에 문제점이 발견돼 시비꺼리다. 여성의 과다노출이 그렇다.

경찰청은 아기 젖먹일 경우를 제외하고 여성이 가슴을 노출할 경우 ‘과다노출’로 간주돼 처벌대상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과다노출의 판단은 사회통념과 행위장소및 주변상황에 따라 달리한다”고 덧붙였다.

규정 자체의 명확성도 약하고 적용 판단도 애매하기 짝이없다. 통행을 방해하는 구걸행위나 장난전화.불안감 조성등도 처벌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경범죄 처벌이 사생활 자유침해와 범죄자를 양산하는 후진적 법률‘이라는 지적이다. 1970년대의 퇴폐가 지금은 정상적인 사생활 자유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유행이 곧 퇴폐라는 해석도 있다. 지금의 경범죄 처벌법이 시간이 지나 다시 어떤 평가를 받게될지 궁금해지는 이유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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