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삶
종교와 삶
  • 정은영
  • 승인 2014.04.28 2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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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했다. 아편이란 근본을 치료하지 않고 통증만 가시게 함으로서 의존력만 높이는 것을 말한다.

아편은 사회질서의 영속화 장치며 종교는 그런 아편을 팔아먹으면서 그 조직을 유지한다. 또 프로이트는 종교를 최면(催眠)이라고 말했다.

최면이란 근원적 문제의 해결이 없이 일시적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는 도올 김용옥이 그의 저서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종교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설명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를 갖고 있다. 무신론자라고 하는 경우도 ‘무신론’ 그 자체가 종교일 수 있다. 종교는 역할이 긍정일 때 피폐한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큰 역할을 하기도 하고 부정일 때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피해를 주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천국이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된 국가다. 그래서 기존 종교집단에서 말하는 사이비 종교인들도 많다. 사이비로 몰리는 교단의 경우 이를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신도 만들기에 나서게 되고 사회는 그들로부터 불안을 느끼게 된다.

사이비 교단의 경우 종교 활동이 국민들의 일상적 생활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자유로운 일상에서 종교 활동이 이뤄져야 하는데 스트레스가 됐고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 종교 활동이 잘못된 경우다.

맑스가 말한 종교의 아편론은 곱씹을수록 의미가 새롭다. 우리 주변의 종교인들을 돌아보면 맑스의 종교론은 지당한 말씀이기도 하다.

인간은 늘 불안한 삶을 이어간다. 곡예사가 줄을 탈 때 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듯 인간들도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를 가지며 삶이 어려울 때마다 종교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마는 경우도 흔하다. 이는 종교의 폐해다.

우리는 건전한 종교 활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종교가 기여하는 바는 실로 엄청나다. 늘 술에 취하기만 하면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었다. 가족들은 불안에 떨었고 술에서 깨어나면 당시 상황을 전혀 몰랐다.

가족들이 그에게 종교를 믿게 했다. 그때부터 그는 술을 마시지 않음으로서 폭력을 하지 않았고 존경받는 가장이 됐다. 이는 종교의 긍정적 면이다.

이런 긍정적 면이 부각되면서 종교는 발전해야 한다. 많은 신도를 거느린 종교집단보다 산골에서 몇 명 안 되는 신도들과 함께 지역사회 소금의 역할을 하는 작은 종교집단이 존경받는 경우를 많이 본다.

최근 들어 각종 종교 집단들이 덩치를 키우는데 경쟁적이다. 하지만 덩치를 키울수록 내적으로는 부실하다. 덩치도 키우고 내적으로도 탄탄한 경우를 만들어야 한다. 종교 활동에 대해 맑스나 프로이트가 말한 아편이나 최면을 생각하면 안 되는데 결국 종교를 믿는 결과는 대부분 그렇게 되고 만다는데 아쉬움이 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최소한 경제대국에 속한다. 하지만 정신문화를 비롯해 나머지 부분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살림살이가 윤택해졌는데도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이 이를 반증한다.

사찰과 교회 등 종교시설 수가 증가하고 있고 규모를 크게 확대하고 있는데도 그와 비례해서 인간들의 정신적 불안도 커지고 있음이다.

봄인지 여름인지 분간이 어려운 계절이 가고 있다. 진도 앞바다 여객선 침몰사고로 국민들의 트라우마도 극에 달하고 있다. 지금 국민들은 누구를 믿어야 할까.

맑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했는데 아편이라도 취해야 할까. 아니면 프로이트의 지적처럼 최면에 걸려서 하룻밤이라도 죽은 듯이 자야 숨을 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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