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아날로그
가을빛 아날로그
  • 이두남
  • 승인 2016.10.18 08: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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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가을 하늘에 낙서를 한다.

파란 물감이 손가락 끝을 타고 온 몸으로 번진다. 옛 친구의 정겹던 웃음이 묻어나고 어느 길로 왔는지 첫사랑 그 아이 부끄러운 얼굴이 파란 하늘로 흩어진다.

   
이두남 논설위원

가을엔 편지를 쓰고 싶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종이에 쓴 기록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무에서 얻은 종이는 나무의 나이테와 DNA를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후각과 시각 그리고 촉각을 타고 온전히 전달된다.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가슴 설레던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종이 대신 전자화면에 익숙하면서부터다. 쉽게 전달되는 화면과 함께 쉽게 기억 밖으로 사라져 버리는 탓인지 가슴은 더욱 시리고 공허하다.

디지털의 문장과는 달리 종이에 쓴 활자는 개인의 개성이 살아있고 잉크가 바랄 때 까지 손끝의 정성과 풋풋한 감성이 묻어나 오랜 여운을 남긴다. 이 가을, 그리운 사람을 더욱 그립게 하고, 첫사랑의 향기도 빛바랜 종이위에 잔잔한 고백처럼 얼룩진다.

가을빛 가득 머금은 국화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어느 사이엔가 창 너머 풍경이 기웃거리고 엷은 아침 햇살이 빗금으로 들어와 책갈피를 대신 넘긴다.

“소년 시절의 책 읽기는 틈 사이로 달을 엿보는 것과 같고, 중년의 책 읽기는 뜰 가운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며, 노년의 책 읽기는 누각 위에서 달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모두 살아온 경력의 얕고 깊음에 따라 얻는 바도 얕고 깊게 될 뿐이다.” 심재 장조(중국 청나라 초기)는 유몽영(幽夢影)에서 책 읽기를 달구경에 비유했다면 나는 창틈 사이로 아침 햇살을 엿보는 것일까?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과 같다. 이 가을에 만나게 될 좋은 책을 상상해 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윤동주, 박경리 그들의 정서에 몸을 맡기고 가을의 느낌에도 충실해 보고 싶다.

책을 읽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으면 손 편지를 써본다. 꽃향기처럼 우체통에 편지를 띄워 보낸다. 나에게도 아직 뛰는 가슴이 남아 있다는 것을 느껴보는 시간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따뜻하게 각인되는 시간이다. 

통계적으로 지구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확률은 1/100경조가 된다고 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든 것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존귀하게 태어난 생명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산다는 것은 숱한 인파속에서 아름답고 고운 인연을 만나 마음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고귀한 생을 덧없이 허비하거나 흐르는 물처럼 흘려 보내버린다면 불행의 편에 서서 슬픔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다. 구하기 쉬운 것이 사람이고 시간이라면, 또한 구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람이고 시간인지 모른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과 시간을 생의 첫 날인 것처럼 대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장식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생은 연극이고 한 편의 드라마라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 무대에서 연기하는 주연 배우다. 그리고 무대에서의 등장과 퇴장은 그들의 자유이며 선택이다. 자신이 원한다면 살아가는 동안 자신만의 다양한 무대를 쌓을 수 있다.” 세익스피어가 인생에 대해 표현한 글이다.  

행복이든 슬픔이든 어제는 과거이고 유물에 불과하다. 내일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수수께끼라고 한다면 내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선물을 한순간도 걱정이나 슬픔으로 허비하지 말고 한권의 책과 한통의 편지로 채우는 것이 더욱 가치 있는 삶이라 여겨진다.

책 속에는 많은 길이 있다고 한다. 책 속의 길은 오묘해서 책장을 넘기는 순간 마음의 평온이 찾아 든다.

책갈피를 넘기며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마음의 오솔길에 촉촉이 젖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 길을 오래 걷다보면 작은 일에도 감사 할 줄 알고, 보잘 것 없는 것에도 감동 할 줄 아는 마음이 자라난다.

감사의 마음은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균형을 이루게 하여 면역력 증가와 질병의 원인인 활성산소의 양을 감소시키고 혈관을 유연하고 젊게 해 노화를 늦춘다고 한다. 

어느덧 지천이 연두 빛 일 때를 지나, 달팽이관을 깨우던 여름날의 말매미 소리도 이명으로 남은 한 구절인 듯 산울림 저 편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 귀뚜라미 한소절로 채워지는 동안 모두 떠날 채비를 하는지 얼굴마다 색색의 화장에 열중이다.

이 가을에는 조금 느린 듯 행복한 아날로그로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나 자신이 향기로우면 시간도 따라 향기롭게 흐른다.

한권의 책을 내 삶의 여백에 끼워 넣고, 빨간 우체통 앞에 서서 그리운 이에게 띄우는 편지처럼 기대와 설렘으로 물들여보는 가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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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2016-10-18 22:04:21
가을에 읽는 책이 이토록 향기로울 줄 물랐네요. 저도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편지를 쓰는 일은 쉽지가 않은데 함 써서 좋은 사람에게 보내봐야 겠네요
맛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