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는 곧 나아감의 바탕이다.
양보는 곧 나아감의 바탕이다.
  • 이두남
  • 승인 2016.10.3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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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재상 장정옥이 고향에 저택을 지으려 하는데 이웃집이 경계선에서 땅 석자를 더 요구하여 서로 다투다가 소송이 걸렸다는 관리인의 편지를 받고 재상은 시를 써서 답서로 보냈다.

   
▲ 이두남 논설위원

‘천리 길 온 편지가 길과 담 사이의 겨우 석자 때문이라니/ 땅 석자를 이웃에 양보하면 무슨 해가 있겠는가/ 만리장성은 지금도 있건만/ 그때의 진시황을 지금 누가 보았는가’

편지를 받은 관리인이 재상의 큰 뜻을 마음에 새겨 이웃집에 땅 석자를 양보하자이웃도 따라 땅 석자를 내놓았다. 이렇게 생긴 ‘여섯자 골목(六尺巷)’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에게 두 가문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작은 것을 버릴 줄 아는 양보의 미덕을 배워야 한다.

양보를 할 때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오히려 자신에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는 것이다. 역사에도 작은 양보로 큰 꿈을 이룬 일들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통일의 일등공신인 한신이 시장잡배의 도전에 대항하지 않고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수모를 받으면서도 그 길을 택했다. 한신이 과하지욕(跨下之辱)을 택했던 것은 눈앞의 굴욕을 참고 이겨내 훗날 대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조조는 한실의 부흥을 위해 ‘反 동탁 제후 연합’을 도모했으며 자신의 출중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맹주의 자리를 원소에게, 선봉장을 손견에게 양보함으로써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한편 연예계 선행의 대표 아이콘 유재석은 항상 동료를 배려하고 먼저 양보하는 마음으로 본인은 물론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돋보이게 한다.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지만 남을 이기기만 좋아하는 사람은 적을 만들 수도 있다.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염소가 서로 먼저 가려고 싸우다 두 마리 다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이솝 우화가 있다. 그러나 한쪽이 먼저 양보를 하였다면 둘 다 안전하게 가던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 운전을 하다보면 많은 일들을 겪는다. 앞 차 뒤에 바짝 붙여 위협을 하는가 하면 갑자기 끼어드는 차에 보복운전을 하는 등 우발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하는 일이 있다. 잠시의 분노를 참지 못해 백일의 근심을 만드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독수리처럼 날고 싶다면 닭과 싸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두 물건이 부딪히면 소리가 나게 마련이다. 소리가 나는 것은 둘 다 단단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이 부드러우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골목길에서 조금만 후진하면 소통이 될 일을 끝까지 버티며 상대에게만 양보를 강요하다 도로가 꽉 막혀버리는 답답한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이 양보한 만큼 서로가 빨라지고 기분도 상쾌해진다.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양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운전을 하면 언제나 불편하고 자신의 마음이 먼저 상하기 마련이다.

자신은 양보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강요하거나 자신이 양보한 만큼 상대방이 양보하기를 바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양보라 할 수 없다. 형식이 아닌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해야 진정한 양보다.

인정은 변하기 쉽고 처세의 길은 험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힘들고 난처한 상황에서 먼저 배려하고 한발 물러나 양보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앞의 한신이나 조조처럼 한 발 물러남으로써 훗날을 기약 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행동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하철에서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학생들은 보기 드물지만 경로석에 앉아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은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아름다운 문화는 세월의 흐름에 묻혀 가고 있는듯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양보의 미덕은 이성적인 마음보다는 감성적 경험에 의해 변화 할 수 있다.

양보는 자신을 낮추는 태도이며 칭찬받을 만한 행동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채근담에 이르기를 ‘사람을 대할 때 한 걸음 양보하는 것을 높다 하나니 물러서는 것은 곧 나아감의 바탕이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남보다 높은 곳만 바라보고 일등만 지향하는 문화에 익숙하여 뒤처지는 것을 패배라고 인식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팍팍하고 여유가 없는 세상을 살다보면 눈앞의 작은 이익에 급급해 소탐대실 (小貪大失)의 우를 범하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거듭나고, 더 큰 자신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산에 있는 수많은 나무는 서로 시샘하거나 다투지 않는다. 바람에 가지가 부딪혀 꺾여도 결코

한탄하지 않고 하늘과 햇살을 조금씩 양보하며 산을 이룬다.

저 높고 푸른 가을하늘아래 살아가는 우리들도 한걸음씩 더 양보하고 배려하여 서로에게 따뜻한 햇살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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