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
고 백
  • 이두남
  • 승인 2017.01.0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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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두남 논설위원

무채색 겨울 산에 오르면 어느덧 고고한 순례자가 된다.

색감도 낙엽도 떨쳐 버린 채 기도하듯 서 있는 나무의 올곧고 의연한 신념에 기대고 싶어진다.
찬바람은 제각각 음절을 지닌 채 나뭇가지를 두드리고, 발밑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들은 악보를 타고 심상에 머문다.

한 때 이 산을 흔들던 억새도 아우성을 묻고 여린 춤사위로 노래한다.

영겁의 거친 풍화작용 견뎌내고도 말없이 물줄기 감아 도는 바위의 나이테, 계절의 순환에 익숙한 듯 마른 햇살을 받아 숙연하다.맑은 계곡물은 나무의 숱한 사연이 담긴 엽서를 배달하느라 종종걸음 치고 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숨죽이며 눈을 감고 기도하는 시간, 마침표를 찍을 오솔길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려 한다.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곳은 또 다른 시작임을 잘 알고 있기에 저 나뭇가지의 실눈처럼 내 자화상을 그대로 닮은 그림자만이 새롭게 내딛는 발걸음을 희망으로 밝히며 길을 재촉한다.

새롭게 시작하는 길 위에서 지난 한해 조금 덜 챙긴 공간이 있었다면 그 공간은 삶의 여백으로 남겨 고백의 시간으로 채워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고백 (告白)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하다‘란 뜻이다. 어원을 살펴보면 고백하는 자는 공개적으로 소(牛)를 제물로 바쳐 놓고 하얀 하늘 백(白)을 향해 자신의 잘못을 외치는 자기 다짐이다.

또한 고백이란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민낯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습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고백의 시간을 통해 잘못된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삶의 여정에 또 하나의 지표로 삼기도 한다. 어쩌면 고백은 완벽한 변신이자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회심의 첫 단추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겨울의 눈처럼 깨끗하고 하얀 ‘숫’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숫’ 은 깨끗하다는 뜻의 접두사이다. ‘숫백성’ 이라고 하면 거짓을 모르는 순박한 백성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쌓인 상태 그대로의 깨끗한 눈을 가리켜 ‘숫눈’ 이라고 한다.

새해에는 숫백성이 모여 사는 숫눈처럼 깨끗한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시조시인 서벌의 ‘섣달 그믐밤의 눈’ 전문이다.

새하얀 가운 입은 하늘의 약사님이/ 아픈 우리나라 건강 빨리 찾으라고 조제한 귀한 약봉지 얼른 풀어 내리신다/ 앓는 산, 우는 강물 그런 들판, 그런 마음 다 함께 받고 있는 조선백자 빛깔 가루/ 새해가 내일이니까 건강 금세 찾을거야

신년의 눈부신 해가 어둠을 밝히는 지금, 앓고 있는 대한민국을 위해 시시비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남의 탓만 하는 선동가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관찰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 할 줄 아는 숫백성이 되어 숫눈처럼 투명하게 살아가는 세상이길 바라본다.

그리고 빛의 반대편에서 그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양을 향해 거룩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본다.

오솔길을 내려오다 불쑥 내민 곰솔나무 뿌리가 발길에 툭툭 채이며 가는 길을 묻는다.
건조했던 마음에 칼칼한 바람 맛과 온 몸을 굴리는 황량한 낙엽소리와 함께 새롭게 움틀 시간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려 한다. 

우리가 맞이하는 매 순간이 피어나는 꽃봉오리가 아닌가 싶다. 삶에 땀과 눈물과 혼을 담아 열심히 노력하고 그 속에서 떨쳐버린 가지처럼 고백의 시간을 가져 본다면 매 순간이 아름다운 꽃봉오리로 피어 날 것이다.

내 정신을 단단히 동여매 주는 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인정받고 삶의 여정에 하나의 지표가 되어 나날이 새롭게 거듭나도록 작용하는 고백의 과정이 아닌가 싶다.

새해에는 삶의 행간에 열려있는 여백 너머로 희망의 빛을 듬뿍 담아 꿈을 이룰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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