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을에는
[칼럼]가을에는
  • 이두남
  • 승인 2017.10.25 18: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두남 울산시민신문 대표

창가에 가을 햇살이 찾아들면 나도 모르게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왜일까?

가을비 내린 오후의 남은 안개가 바람에 실려 산허리를 휘감고 날아갈 무렵이면 더욱 더 그러하다.

시월 중순을 넘어가는 햇살이 어깨를 쓱 그으면 괜스레 울적해지고 늑골사이로 온기가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이럴 땐 허물없는 친구와 따뜻한 커피 향을 느끼며 엷은 색깔로 드러나는 먼 풍경에 풍덩 빠져들어 시인이기도 화가가 되어 보기도 한다.

밤이 되어 찌르르기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릴 때면 괜스레 마음 울적해지기도 하고 첫사랑 한 줄 꺼내들고 거울 보듯 빙그레 웃음이라도 담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간 읽고 싶었던 책도 꺼내보고 싶지만 가을꽃 축제와 그림 전시회, 가을밤을 수놓을 오페라 공연에 이미 마음이 반쯤 떠나버린 탓인지 창문을 활짝 열고 책갈피 같은 가을의 문장을 하나씩 펼쳐본다.

가을에는 사람들의 마음도 가을들판처럼 직유법으로 넉넉하고 가을하늘처럼 공활해지는 것이 아닐까.

파란 하늘이 부사로 펼쳐지고 그 위로 구름 한조각 수사로 따라 붙는다.

내가 아는 길만 택해 왔는데도 시력은 원시안이 되어가고 발걸음은 더 멀게만 느껴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고추잠자리가 동사로 떠 돌때면 한자락 추억이란 추상명사 앞에 내 모습 정처 없어진다.

콩콩 산길에 찍어 놓은 낙엽 따라 해거름 짧아지고 내 마음도 애둘러 식어간다. 오솔길 걷는 내 발걸음이 주어라면 나의 서술어는 어디쯤 써 내려가고 있을까?

후두둑 바람결에 놀란 청솔모가 툭, 밤송이를 떨어뜨리며 내 발길을 묶는다.

이 길 스치고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과 어디선가 울어대는 산새소리도 식어가는 갈바람을 닮았다.

잃을 것보다 얻을 것이 더 많을 나이, 못 본 척 원시안에 더 어울릴 시간에 다시 찾아줄지 모를 '가을'이란 명사 한 자락을 ‘가을은 서글픈 친구‘라고 은유법으로 불러본다.

꽃잎처럼 흩어진 내 노래를 어느 산자락 쇠박새가 따라 부르며 쪼아댈 때면 이제는 모두 놓아주어야 할 때, 저 소나무처럼 제 속으로 삼킬 때, 팔랑 팔랑 손아귀 풀린 가을이면 나는

꿋꿋이 서 있는 주어보다 낙엽으로 뒹구는 형용사이고 싶다.

이 가을과 나의 행간엔 가을빛 같은 직유법의 꿈이 퇴고되어 가고 있다.

점점 저물어 가는 가을, 보랏빛 쑥부쟁이 앞에 우두커니 선 내 마음을 읽는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도 구분 못하며 들국화라고 통틀어 이름 붙였던 부끄러움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보면 어릴 적 먼지 덮인 신작로에서 환하게 맞아주던 추억이 떠오른다.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자태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더 편하게 해 준다. 신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만든 꽃이 코스모스라는 설이 있다.

봄에 핀 꽃 들이 화려함을 뽐낸다면, 가을에 핀 꽃들은 외롭게 서서 제 속을 다독이며 안간힘을 다하는 듯 해 애정이 더 가는 것 같다.

황금들판도 점차 색감이 바래지면 낮은 더 작아지고 밤은 더 자라는 시간,

이 때쯤이면 높은 산 위로부터 형형색색의 치장을 하고 화려한 만찬은 곧 이 곳 정원까지 벌어질 것이다. 누구를 만나려고 저토록 야한 치장을 하는지, 어디를 가려고 저토록 성급하게 옷매무새를 주섬주섬 고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무성했던 한여름 동안 부대낀 눈길 뿌리치고 가는 길이 못내 아쉬워 붉은 탈색의 여운을 남기고 파란 하늘을 지우며 떠내려가는 구름은 새털처럼 감미롭지만 바람처럼 허무하다.

그 허무속의 화려한 말들 다 알아 듣지 못한다 해도 동토 순례자의 길 거쳐 따뜻한 봄날에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가을이 다가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까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 진다.

그 허무함을 달래려는 듯 햇살 부서지는 가을하늘 아래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축제들은 국화꽃처럼 향기롭고 코스모스처럼 청순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의 가을 운동회처럼 설레고 가진 것 없이도 넉넉했던 날들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언젠가 요란한 잎들은 가을을 돌아 세우겠지만 가을이 남긴 따뜻한 기억들로 한동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간다. 상처받고 이겨내며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새벽이슬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풀잎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듯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대사 중에 인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다. ‘한쪽 문을 닫을 때 다른 창문을 열어 놓는다.’ 이는 한때의 실패나 좌절 때문에 또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겉으로 드러난 물질에만 연연하여 보이지 않는 소중한 마음을 잃고 살지는 않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그런 가을이었으면 한다.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자신만이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저마다의 소명과 역할을 안고 태어났을 것이다.

이 가을 다 가기 전 년 초에 기원하던 푸른 꿈들이 무르익어 그 소명과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가을빛에 간절히 바라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