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국화 옆에서
[칼럼]국화 옆에서
  • 울주일보
  • 승인 2017.11.1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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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남 대표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오랜 친구처럼 나를 불러내는 이가 있다. 계절의 틈바구니에서 낙엽처럼 방황하던 이때 불쑥 나타난 것이다.

한여름 무더위를 잘 견뎌내고 잰걸음으로 달려왔는지 양 볼이 샛노랗다. 서로 잊고 있던 동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많았지만 우리 만남은 예전처럼 편안하다.

우린 눈으로만 말하지만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함께 거닐고 바라보며 활짝 웃기도 했다.

또 계절이 우리를 갈라놓겠지만 겨울이 오면 눈 내리는 창가에 앉아 친구의 이름을 떠 올리듯 모락모락 찻잔 속에 노란 국화 얼굴 동동 떠 올리게 될 것이다.

다산이 쓴 '국영시서'에는 국화가 여려 꽃 중 뛰어난 점이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늦게 피는 것이고, 둘째는 오래도록 견디는 것이며, 셋째는 향기로운 것이고, 넷째는 고우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면서도 싸늘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국화 향을 뒤로 한 채 어김없이 또 한해를 갈무리해야 한다. 어쩌면 가을 하늘이 더없이 맑은 까닭은 한 해 동안 자기반성과 마무리 다짐을 하는 이유이며, 국화꽃이 늦은 가을에 피어 향기로움을 더하는 이유는 향기롭게 한해를 마무리 하라는 뜻일 것이다. 

한 해의 첫 날부터 정상만을 바라보며 달려오지는 않았는지, 의지가 약해 첫날의 소중한 약속을 져 버리지는 않았는지 잠시 쉼 호흡을 가다듬으며 반추의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몹시 저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 아들은 소극적이었고 신경질적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아버지가 아들을 달래어 등산길에 올랐다. 아들은 아버지의 솔깃한 얘기에 이끌려 막상 산에는 올랐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길에 채이며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 때마다 신경질과 투정을 부렸고 아버지는 계속 토닥이며 갈 길을 재촉했다. 이들은 힘을 얻으며 걷고 또 걸었지만 정상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멍투성이가 됐다. 급기야 아들의 마음은 오기로 변했고 이를 악물고 걸었다.

드디어 정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정상을 본 아들은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솟았고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드디어 정상을 몇 발자국 앞두고 더욱 부지런히 걸었다. 이 때 아들의 발걸음을 아버지가 막아섰다. 

"얘야, 이제 그만 내려가자!" 아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기가 막혔다. 지금껏 고생하며 올라왔는데 정상을 코앞에 둔 지금 돌아가자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 정상이 바로 저기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내려가자고요? 제가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아시잖아요?"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네가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 용기야.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너는 언제든지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확인하지 않았느냐? 사실 내가 보고 싶은 것도 정상에 올라 있는 너의 모습이 아니라 끝까지 오르고 말겠다는 너의 강한 의지였어. 그동안 너는 의지가 약했었거든."

아들은 아버지의 진심어린 말을 듣고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깊은 반성으로 소리 없이 흐느꼈다.

정상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고 당도하는 것이다. 또 오르더라도 그 과정이 깨끗해야 아름다운 승리이다. 정상에 올랐더라도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다. 정상에 오르기에 앞서 인내심과 인격연마에 힘쓰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맑은 하늘, 맑은 강물이 그러하듯 가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며 오롯이 혼자가 돼보게 만드는 계절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하늘을 공유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현실에 찌들어 하늘이 푸르다는 것 마저 느끼지 못하고, 국화꽃 향기를 향유하지도 못한 채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국화향기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는 가을에는 차분한 마음으로 비워내는 연습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많이 담는다고 결코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말은 그 사람의 인품이다. 품(品)은 말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말이 그 사람의 향기가 되는 것이다.

고서를 보면 세종15년에 '억지로 남의 잘못을 찾아내어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하는 사람의 체통이 아니다'라고 말씀했다. 정치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남의 잘못을 낱낱이 드러내어 흉을 보기보다는 상대의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하는 것이 결국 서로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한 해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가을, 국화향기가 온 들녘을 물들이듯 각박한 세상에 따뜻한 인품이 넘치는 사람의 향기가 온 세상에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오던 길을 되돌아보며 행여 나로 인해 아파한 사람은 없는지, 정작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은 날은 없는지 비춰보는 것도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점점 기온이 내려가는 시간, 곧 다가올 겨울에는 따뜻한 국화차 한잔의 의미가 돼 서로에게 향기와 온기를 불어넣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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