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얼룩진 모성애
[칼럼]얼룩진 모성애
  • 이두남
  • 승인 2019.09.2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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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남 대표이사

[울산시민신문] 까치는 토목 기술을 익히지 않고, 설계도면도 없이 본능적으로 나뭇가지 틈새 마른 가지를 물어다 얼기설기 엮어 집을 짓는다. 사람을 가까이하여 사람들이 드나드는 마을 초입에 집을 짓고 사람들의 행동까지 모방하는 영리한 텃새다.

까치들이 지은 집은 구멍이 듬성듬성 뚫리고 참으로 남루하지만 새끼를 향한 사랑만큼은 그 어떤 어미 못지않다. 소박한 둥지에서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따뜻한 정을 나누다 훌쩍 자라면 어느새 둥지를 떠난다. 그때까지 어미는 모든 애정을 쏟는다.

태어날 새끼를 위해 둥지를 짓고 먹이를 물어다 주는 까치를 지켜보고 있으면 바쁜 일상에 잠시 잊고 있었던 부모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까치가 사람을 보고 배웠는지, 아니면 사람이 까치의 모습을 보고 배웠는지 모르지만 서로 동질감을 느끼는 본능적인 고운 심성인 것 같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유별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자식 입에 먹을 것 들어가는 것과 논에 물들어 가는 소리라면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저울의 한쪽에 지구를, 다른 한쪽에 어머니를 올려놓는다면 지구 쪽이 훨씬 가벼울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그런데 까치들의 소박한 모성애와는 달리 얼룩진 모성애로 상대적인 상실감은 물론이요, 자녀들의 미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 사례가 지난여름 뙤약볕처럼 뜨겁게 달구며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어쩌면 부모가 제공해 주는 사회경제적 지위의 세습을 위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잘못된 사랑으로 타인에게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 오직 이기주의에 갇혀 모든 존재의 원인이 자녀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는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이 가는 길을 응원해주는 존재이지 그들의 삶을 대신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기대와 연민은 웃음 뒤에 감추어진 눈물이 될 수도 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고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 거울은 맑아야 사물을 선명하게 비추고 저울은 균형을 지켜야 경중을 정확하게 가늠한다. 거울이 흐리고 움직이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없고 저울이 균형을 잃고 흔들리면 가벼움과 무거움을 제대로 잴 수 없다.

세상은 인격을 지닌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정직과 성실은 도덕의 거울이며 사회의 기본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무리 지나쳐도 그 도를 넘어 불법으로 스펙을 세습하려는 얼룩진 사랑은 심각한 병폐다. 고착화 되는 불평등을 목도해왔던 동시대의 청년들로 하여금 다시 촛불을 들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과거 평범한 사람들이 민주화를 위해 항거하고 이로 인하여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기득권층에 대한 또 다른 항거이며 평등, 공정, 정의의 나라로 진일보하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이 비단 한 사람을 규탄하는 목적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평등, 공정, 정의의 나라로 나아가는 가치 있는 촛불이 되기를 바란다.

새끼들이 훌쩍 자라 떠나 버린 둥지는 볼품없는 폐가가 된다. 햇살이 바람을 안고 내려와 그들의 자립을 응원한다. 비록 남루하지만 그 안에서 용기를 주고 행복을 주는 대화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잘못된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지 못할 비극을 주기보다는 마음의 생각을 잘 표현해서 가시밭길을 만나더라도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 더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다. 풍경이 마음의 풍경이듯 사랑 또한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혼탁해지고 윤리가 땅에 떨어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 헌신적인 사랑이 있기에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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