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82년생 김지영'이 전하는 말
[칼럼] '82년생 김지영'이 전하는 말
  • 이두남
  • 승인 2019.11.13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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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남 대표

[울산시민신문] 어느덧 절기상 입동이 지났다. 그래서인지 차가워진 기온이 늦가을 정취에 스며들어 마음에 더 깊은 궤적을 울리는 듯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은행잎이 거리를 샛노랗게 물들이더니 어쩌다 차가운 바람 한 줄기 흘러들어 이내 듬성듬성 자리를 비워낸다.

이토록 고운 빛으로 물들인 후 어느새 비워내는 날엔 하늘빛도 파랗게 눈부시다. "앞길에 희망이 있으면 이별은 축제와 같다."는 괴테의 말이 이별의 감정을 환희로 승화시킨다. 사는 게 어디라도 녹록치 않은 늦가을, 그래도 붉게 빛나는 아름다운 날이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따뜻한 햇살 한 줄기 응시해 본다.

한 달여 여정으로 미국에 사는 언니가 다녀갔다. 어린 시절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엄마 대신 큰 언니에게 안겨 있는 내 모습을 보며 그때는 몰랐던 미안함과 고마움이 겹쳐졌다. 사회 전반에 걸친 관습이었는지 모르지만 여자로서 인내해야 할 관행의 무게였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2년 전 페미니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82년생 김지영'을 소환했다. 지금은 다른 문화에 익숙해져 있지만 한국 사회의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다.

마침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상영하게 되어 언니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와는 열 살 터울인 언니는 이 영화의 스토리에 더 큰 공감과 충분한 교감이 되었을 것이다. 상영 내내 여기저기서 눈물을 닦아 내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 모두 김지영이 되어 그 곳에 있는 듯 했다.

극중 김지영은 여성이라는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속울음으로 삼켜야 했던 말을 그가 아닌 다른 인물로 빙의 되어 물 먹은 하마처럼 부풀어 올랐던 가슴속 이야기들을 비로소 내뱉는다.

태어나서는 딸이라 외면 받고, 자라는 과정에서는 가부장적인 사회 통념 속에 아들이 우선이라 늘 밀리고, 사회에 나와서는 같은 조건으로 입사했지만 능력부족이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성 차별을 받고 결혼 후에는 출산과 육아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육아휴직 후 어렵게 복직을 하지만 육아문제와 가사노동으로 한계를 느껴 자신의 꿈을 내려놓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은 조롱의 시선이며 관심과 위로는 부재인 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아픔이다.

세월이 흘러 사회통념도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로부터 온갖 차별과 자신을 옥죄는 시스템에서 병들어 가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자신이 겪었을 무게보다 더 크게 억눌려 결국 무너지고 만다. 자신이 대한민국의 딸로 태어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책하고 원망하며 살아왔던 불합리한 시간들이 고스란히 딸에게 전해진 것 같아 그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가 딸을 향해 '너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던진 무덤덤하지만 비장함이 묻어나는 그 한마디는 평생을 속에만 담아두고 못했던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이 사회에서 내 딸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나 차별이 아니라 공정하고 평등하게 다시 시작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어머니가 아닌 한 여성으로서 던진 강한 의지의 외침이었다.

"내가 추구한 것만이 나의 인생을 결정한다. 나는 선택하기 위해 태어났다. 모든 것은 내가 시작하고 내가 끝낸다. 그래야 거기에 쏟은 모든 것을 비로소 나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는 글귀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여전히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82년생 김지영'의 연출을 맡은 김도영 감독은 "내 가족, 친구,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곳에서 살아왔고, 살아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도를 밝혔다.

제도와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급격한 개발과 선진화에 묻혀 아직도 빈부의 격차는 물론, 우리 사회의 오랜 관습과 사회구조가 젊은 청년들의 꿈을 짓밟는 행태는 아직 남아 있다.

김도영 감독의 말처럼 지영의 어머니보다 지영이가, 지영이보다 지영의 딸이 사회적, 경제적 차별 없이, 타고난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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