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삐뚤 아버지 / 이명윤
삐뚤삐뚤 아버지 / 이명윤
  • 이시향
  • 승인 2020.03.27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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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삐뚤 아버지 오신다 삐뚤삐뚤 목소리로 오신다 선생님이 내어 준 빈칸을 채우지도 못했는데 삐뚤삐뚤 부끄러운 아버지가 삐뚤삐뚤 목을 흔들며 오신다

나는 똑바로 쓰는데 글씨가 이상하게 삐뚤어지네, 부조 봉투에 아버지를 반듯하게 쓰던 날 삐뚤삐뚤 웃던 아버지가 치아가 삐뚜름하던 아버지가

삐뚤삐뚤 그려놓은 국민학교 담장 눈들을 지나 삐뚤삐뚤 수레를 따라오는 어두운 골목을 지나 삐뚤삐뚤 노랫가락 엇박자로 부딪히는 선술집 창문을 지나 삐뚤삐뚤 지붕마다 피고 지던 해와 달을 지나

아직 아버지의 빈칸을 채우지도 못했는데 삐뚤삐뚤 아버지가 오십이 넘은 나를 업고 걸어오신다 삐뚤삐뚤 연필 한 자루로 삐뚤삐뚤 새 공책으로 삐뚤삐뚤 노란 토끼 그려진 책가방으로

액자 속의 아버지는 늘 반듯하여 어머니는 두고두고 자랑이신데 내 몸속 지도엔 삐뚤삐뚤이 너무도 많아 아버지 오시는 날 창문을 열면 멀리서도 아버지 어깨가 무겁게 흔들거린다 가만히 아버지를 눌러쓰면

아버지가 눈치도 없이,

삐뚤삐뚤 글자로 걸어오신다

 

[울산시민신문=이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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