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드 인 / 박순
페이드 인 / 박순
  • 이시향
  • 승인 2020.12.03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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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드 인 / 박순

 

 물줄기는 지그재그로 흘렀다 무모하게 뛰어내렸다 절벽 앞에서 뒷걸음질 치고 싶은 날도 있을 것이다 부딪치고 튕겨져 나왔다 무른 바위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시간은 계속된 지 오래 서로는 파편이 되어가는 시간에 충실했다 어느 한 날 폭포는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얼어붙었다 산짐승의 이빨을 닮은 폭포는 바닥을 향해 매달려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폭포와 바위는 뜨겁게 엉겨붙었다 경계를 감춘다 겨울은 마취의 계절이다 눈을 좀 붙여보는 건 어때?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봄은 서로의 경계를 드러내는 통증의 시간 입술 위에 봄을 올려놓는다, 그 환한 봄을,


_서평_

‘나’와 ‘당신’의 경계를 탐문하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페이드 인]은 신예新銳 박순 시인의 첫 시집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명멸하는 세태 속에서 시의 참신성, 다시 말해서 주제의 새로움과 그 주제를 형상화하는데 필요한 작법作法의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가 시인의 위의威儀를 공고히 만드는 것인데, 시집 [페이드 인]은 신예가 갖추어야 할 당찬 어법 - 다수의 산문시와 「올코트프레싱」,「달에게」와 같은 형식의 실험 -과 앞으로 전개될 시세계를 예감할 수 있는, 현상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일관된 예리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음을 눈여겨볼 만하다. 박순 시인의 시선은 전통적 서정의 배경이 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거나 사회적 변화에 반응하는 저항의식의 표출에 놓여져 있지 않다. 그는 오직 자신의 존재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까운 타자他者들을 집요하게 탐문하면서 ‘나’와 ‘당신’의 경계를 탐문하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또 하나 시인은 시집페이드 인을 통해서 그의 시의 경향성 –시인이 지향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응답으로써–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궁극적으로 부조리한 의식意識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되거나 합리성이 구비된 삶이 가능한가의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표명하고 있다.

 시집명이기도 한 시 「페이드 인」은 겨울 빙폭氷瀑의 정경을 통해서 혼탁하고 지리멸렬한 삶을 어떻게 곧추세워야 하는지, 매서운 겨울이 쉼 없이 달려온 삶의 물줄기를 멈추는 휴식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예지를 보여주고 있다.

  ‘페이드 인fade-in’은 연극이나 영화에서 화면이 점점 밝아지는 기법을 말한다. 어둠에 묻혀있던 물상物象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고, 지리한 절망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희망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페이드 인이 보여주는 불안과 격절의 감정들은 ‘페이드 인’(밝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유의 여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부정否定이 결여된 긍정이 외화내빈外華內貧의 궁색함을 면하지 못함을 기억한다면 박순 시인이 등단 5년 만에 내놓은 시집 페이드 인은 불화의 세계를 탐문하며 이 시대가 설정해 놓은 ‘나’와 ‘당신’의 경계가 높은 벽이 아닌 서로 가슴을 맞대는 울타리로써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신예新銳로써 새로운 어법을 실험하는 도전의식과 변증법적 사유의 통로를 따라 긍정에 이르려는 시도는 시 「페이드 인」 한 편에 성공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어쩌면 시집의 시편들은 「페이드 인」의 부록이라고 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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