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처럼 떠나는 가을에
집시처럼 떠나는 가을에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1.11.17 14: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두남 발행인
이두남 발행인

이 거리에 잎이 진다. 먼지가 날리고 또 쌓이듯 행인들은 지나가고 또 머물고 집시 같은 바람이 스친다. 어느덧 내 옆구리에 돋아난 노란 잎 하나도 관절염처럼 삐걱거리다 우울한 계절 쪽으로 빠져나가려 한다.
 계절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옹이 진 가슴은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주름져 아프다.

 건조한 가슴을 달래고 싶을 때는 훔친 가을을 눈부시게 담고 있는 호숫가를 총총 거니는 습관이 생겼다. 호수 위에는 누군가 솜처럼 젖은 하늘을 펼쳐 말리고 있다.
 물결은 바람을 떨치려고 이랑을 내고 그 사이로 하얀 구름은 양파처럼 조각조각 흐르고 있다.

 무엇이 이토록 조급하고 초조한 것일까?

 갈색 호수에 잠겨 꿈꾸는 구름과 산, 그리고 나무들은 모두 비바람에 파편처럼 일그러진 날들에도 한 편의 동양화가 되려고 한다.

덧없이 흘러온 한 해의 끝자락에서 가속을 더하는 시간과 힘겨루기를 하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투영될까? 이 호수의 물굽이로 여울져 있는 저 급격한 계곡을 상상한다.

 천자문을 외우던 유년의 물푸레나무 종아리도 아문 듯, 가나다라 국문에 목청을 높이던 산맥도 하얀 호수 속에서 조각조각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사이로 청둥오리 떼가 눈치도 없이 산빛을 지우며 수면 위로 날아오른다

 한낱 낙서처럼 스쳐 버린 청춘이라 할지라도 꽃이 피고 또 낙엽을 떨치는 일이야 어찌 피할 수 잊으랴마는 입동이 지나는 이맘때면 거리로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낙엽처럼 말도 없이 떠나는 친구의 소식도 그리운 얼굴도 휑하게 스친다
만보기에 의지해 달려왔던 날 대신 내가 걸어왔던 수많은 행보를 투영해 본다.

저물녘엔 구부러진 햇살에 등을 기대고 온갖 상념에 젖기도 한다. 마주 보거나 등을 돌리고 앉은 건물을 지나 밖은 초겨울이고 나는 중년을 지나는 얼간이가 되어있다는 사실에 말갛던 얼굴이 낙엽처럼 타들어 간다. 지금의 나는 건조증에 젖어 있고 어딘가에도 속하지 않는 일조량에 만족해야 한다.

 눈만 뜨면 쪼아대는 진보는 생각을 벗어나려고 하고, 몸만큼 느릿한 보수는 변환 중이다

 내 한쪽의 밀물과 다른 한쪽의 사막이 그랬듯이 한잔의 커피에 젖는 가벼움보다 석회가 고여 드는 관절이 더 버거운 시간이 되어 버렸다. 원시로 회귀하려는 시각도, 클래식에 젖던 청각도 그리 신기하지 않다.

 오래전 퇴색한 트로트 가락이 국민가수로 해동되어 그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가끔 찾아 들 뿐, 신용카드처럼 단단한 친구를 갖지 못한 것이 아쉬워지는 계절이다.

 합리적인 줄거리라고는 찬바람이 전부 쓸어 가 버리고 그나마 은행잎이 코로나 상생지원금 카드의 마지막 남은 잔고처럼 노랗게 흩뿌려져 가을의 끝자락을 채색하며 위안을 보태준다
 
 자연이 그러하듯 욕심을 내지 말자, 손도 머리도 뱃살도 가볍게 하자고 수 없는 다짐을 해 보지만 어려울 것 같지 않은 일이 내 것이 되어 이미 익숙하다.

 가을이 저질러 놓은 온갖 행각을 이루 말할 수 없듯 사람들과 시끄럽게 섞여 방치되거나 억압받았던 시간이 파도처럼 반복적으로 다가와 후회와 미련으로 남는 장면도 더러 있다.

 다소 느리게 시작한 한 해가 빠르게 저물어 가고 나는 어디쯤 서 있는지. 내가 잡은 방향타가 향한 곳으로 잘 항해하고 있는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핀다.
 
 나무는 추운 겨울을 가벼운 몸으로 견뎌 내기 위해 바람의 힘을 빌려 잎을 떨군다. 그 잎으로 제 몸을 감싸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이듬해에 더 튼튼한 나무로 성장하기 위한 자양분이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살면서 후회되거나 아쉬운 일도 있지만 그것을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여백 없이 모두 저장해 놓고 살다 보면 몸에 고장이 나거나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견뎌 내기 버거울 때가 종종 있다.

우리도 나무들처럼 비워내는 작업을 하며 속도에 초조하기보다 방향을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한 때이다

 곁에 다른 나무가 있어야 서로 의지하고 바람을 막을 수 있듯, 욕심은 줄이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그 온기로 살아가는 따뜻한 겨울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