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가시나무
겨울 가시나무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2.01.1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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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남 발행인
이두남 발행인

   달의 말을 담으려고 기러기는 그렇게 어두운 문장으로 허공을 그어댔나 보다.

 군밤 같은 겨울밤이 까맣게 지워져 가고 달빛에 기대었던 조밀한 언어들은 차가운 창문 틈에 걸려있다. 모든 꿈은 달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보름달은 카페인보다 강한 자극이어서 볼수록 당기는 중독이어서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한 두 손이 겹다. 긴 겨울밤 간절한 바람이 달빛에 익어간다.

 새하얗게 펼쳐 시작한 1월의 달력이 다 소모되기 전에 이케다 다이사쿠의 시를 떠올려 본다. ‘인생은 한 권의 노트와 같다/ 하루하루 노트를 넘기면/ 새하얀 공백으로 새로 펼쳐진다/ 그 공백에/ 대 서사시를 힘껏 써 내려가야 한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야 한다’

 매일 새하얗게 펼쳐진 공백의 노트처럼 하루하루 희망을 펼치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꿈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깊숙이 전해진다. 

 오늘도 추위를 목덜미에 두르고 평소 내가 즐겼던 장소에 어김없이 정박한다. 친구처럼 늘 찾던 아메리카노는 선택의 여지 없이 나를 마신다. 이때쯤 내 귀를 송두리째 장악한 블루투스는 국민가수로 역주행한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노래로 겨울바람에 데인 가슴을 보듬어 준다. 

 딱히 할 이야기가 없는 것 같은데 커피잔이 빌 때까지 나를 묶어놓는 비결에 의문을 품는다. 정말 나는 외로운 사람일까? 내 목이 마르고 바닥 난 카페인이 나를 주시하자 본능적으로 블루투스의 볼륨을 올린다. 맞아 우리는 외로운 사람들이야. 나는 하루의 책갈피를 다 채우지도, 대 서사시를 옮기지도 못한 채 노트를 넘기고 새하얀 공백의 노트를 의식하지 못한 채 갈지자로 갈겨 쓴 것이 분명하다.

 노트에는 작년 가을에 쟁여놓은 단풍잎이 손금처럼 핼쑥하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랫가락은 제풀에 취하고 창문 너머 풍경은 몰래카메라처럼 나를 찍어대고 있다.

 흰 눈이 내린 적도 없는데 푹푹 쌓이고 눈사람처럼 멍하니 한 곳만 응시하고 있다. 벗어버린 자작나무는 추위에 무고한지, 어린 시절 함께 놀던 동무들은 잘 지내는지.

 타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의인들의 가족을 생각한다. 떠나보낸 아픈 사랑을 기억하려고 속을 하얗게 태우며 함께 했던 날을 회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내 섬세한 감정에 미세먼지가 이입되었는지 젖은 눈시울로 앞의 풍경이 가려졌다.

 미안하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이 채 닿기도 전에 겨울 꽃잎처럼 꽁꽁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들의 얼음 같은 가슴이 녹아내릴 수만 있다면 뱁새 한 마리조차 가두지 못하는 가시나무 가지에 차디찬 겨울바람이 걸려있다. 가질 수 없는 것이 더 좋겠다는 것도, 소중한 것일수록 더 놓아야 한다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되어간다.

 벌써 몇 해를 거듭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별 방역수칙만큼이나 바람이 촘촘하게 차다. 이미 사람과의 신체적 거리가 멀어지고 마음마저 찬바람에 얼어붙은 가시나무처럼 서로를 찌르고 있다. 가시나무 사이로 뱁새가 재잘재잘 지저귀며 떼를 지어 들락날락하다 후르르 날아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재잘거리는 일상의 일들이 얼마나 단단하게 밀봉되었던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지 못하는 우리는 가시나무처럼 뾰족하고 아프다.

 세상 많은 것들이 아픔이 지나간 뒤에야 약이 된다는 것을 가시나무에 베인 바람의 말처럼 귀에 윙윙거린다. 그 사이 사람들의 이기심이 되살아나 공중파처럼 잉잉거린다.

 누구는 우측으로, 또 누군가는 좌측으로 박제된 가자미눈이 되어 가고 있다. 가자미 뇌는 바닷속인데 늘 육지에만 놀고 있으니 눈이 돌아가기 쉬운가 보다.

 정치인들은 가자미를 프라이팬에 얹어놓고 좌, 우로 뒤집는다. 어리석은 가자미가 육지의 국민일 때 가장 속이기 쉽기 때문이다. 한쪽 눈만으로는 세상을 재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기 때문일까? 입으로만 외치는 공정과 정의에 못 이기는 척 돌아누울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일까?

 기러기 지나간 허공에 떨군 새하얀 접시 하나, 무엇을 담아야 할지 궁리를 하게 되는 겨울밤이 시리다. 오늘 밤 가시나무에 숨어든 뱁새는 옹기종기 모여 어떤 단꿈에 젖을지 부러운 겨울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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