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법칙’
‘헤밍웨이의 법칙’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2.09.2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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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남 발행인
이두남 발행인

나는 온전한 가을을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의 투명하던 가을은 더 붉게 퇴색되고 9월은 더디게 찾아왔으나 성급했다. 가을이란 말에는 몇 방울의 눈물이 함유되어 있다. 아니 아득한 회한으로 가려져 있다. 지난 날 그 짧은 사랑이 나를 지탱해준 온기라면 이 가을은 더욱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나 가을의 초입부터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할퀴고 간 흔적이 역력하고 모든 것은 가려져 있고 사람의 마음은 지하 주차장처럼 긴 어둠에 매몰되어 간다.

숨바꼭질로 맴돌던 내 어린 동산은 꼭꼭 숨어 보이지 않고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만 비칠 뿐, 가을이 오기 전에 많이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서쪽 비스듬히 가을빛이 묻어온다. 거의 매일 마시는데도 커피는 물리지 않으니 가을 탓을 해도 소용이 없다.

독서의 계절, 가을이 오면 헤밍웨이의 문학이 단풍잎처럼 더 짙어진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헤밍웨이의 소설은 시를 읽는 듯 섬세한 표현과 삶의 지침서가 될 만한 명대사가 많다. 특히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겨준 ‘노인과 바다’에는 “희망을 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어. 원래 좋은 일이란 계속 지속되지 않거든.” “바다는 비에 젖지 않아. 어떤 시련이 와도 시련은 젖지 않아” 망망대해에서 배만한 다랑어를 배에 매달고 험한 파도와 다랑어의 피 냄새를 맡고 따라오는 상어 떼의 피 말리는 위협 속에서 노인이 동행한 아이에게 건네는 처절한 말이다. 시련의 연속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힘이 되는 언어들로 이 가을이 풍요롭게 들린다.

헤밍웨이의 행복론도 이와 같다.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될 수도 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손이 닿는 가까운 곳에 있다. 행복을 가꾸는 것은 자기 손이 닿는 곳에서 꽃밭을 만드는 것이다.”

카피라이터겸 작가인 게이트 카나리는 이를 정리해 ‘헤밍웨이 법칙’이라 말했다. 이 헤밍웨이 법칙을 미국의 어느 인문학 대학 교수가 심리학 강의 시간에 실험으로 보여준 예가 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풍선을 하나씩 나누어 주며 그 속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고 바람을 불어 빵빵하게 채워 천장으로 날려 보내라고 했다. 한참이 지난 다음 교수는 5분 내에 자기의 이름이 들어 있는 풍선을 찾아보라고 했다.
학생들은 자신의 풍선을 찾으려 서로 부딪치고 밀치며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5분이 지났지만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는 풍선을 찾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교수는 이번에는 아무 풍선이나 잡아 거기 넣어둔 이름을 보고 그 주인을 찾아 주도록 했다. 순식간에 모두 자기 이름이 들어 있는 풍선을 하나씩 받을 수 있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지금 실험한 자기 풍선 찾기는 우리 삶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행복을 찾아다니지만 행복이 어디 있는지 헤매고만 있습니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함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풍선을 찾아주듯 그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헤밍웨이의 법칙이다.’

행복은 무지개 너머 머무는 먼 곳에 신기루처럼 있는 것이 아니다. 헤밍웨이가 말하듯 바로 내 손안의 작은 꽃밭을 가꾸는 일이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행복이 곧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절차탁마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처럼 한 소쿠리에 담은 감자를 강물에 씻으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모든 감자의 껍질이 벗겨진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헤밍웨이의 법칙’은 어려운 수학공식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행하는 과정 속에 진심과 정을 담으면 그것이 해답이 된다. 

우리는 이 사람의 재주를, 저 사람의 권세를 부러워하며 살아간다. 내가 가진 것에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애꿎은 하늘을 원망하거나 부모를 탓하며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헤밍웨이는 자신 내면의 수많은 보물은 보지 못하고 외부로만 향하는 불행한 삶의 자세를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남을 도우고 타인과 함께라면 더 큰 행복을 향유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성급하게 다가온 가을은 어느새 여름을 밀어내고 버젓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벼 이삭을 겸손하게 물들이고 과일의 과즙을 달콤한 손놀림으로 덧칠한다. 결실의 가을을 시샘이라도 하듯 어김없이 일침을 가하는 태풍을 탓하기보다는 철저한 예방을 하고 상처를 함께 씻어낸다면 더 행복한 삶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가을에는 더 풍요롭고 겸손한 내면으로 채색해보는 것도 값진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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