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속에 삭아가는 반구대 암각화
논쟁 속에 삭아가는 반구대 암각화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2.10.05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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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은 편집국장
정두은 편집국장

교통사고를 당한 중상자가 병원에 실려왔다. 그런데 처치법을 놓고 의사들이 갑론을박을 하고 있다. 환자는 숨 넘어가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보호자는 속이 탔다. 이쪽 말을 들으면 이쪽 말이 옳고 저쪽 말을 들으면 저쪽 말이 맞는 것 같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간호사가 병원장을 불렀다. 병원장은 단순, 명쾌하게 결론을 내셨다. 그런데 그뿐이다. 병원장이 가고나자 의사들이 다시 서로 옳다고 다툰다. 중상자는 죽기 일보 직전이건만.

문화재 최고 가치로 평가받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바로 그 꼴이다. 무려 57년간 암벽은 풍화작용으로 마모되고 물고문에 시달리다보니 한마디로 빈사지경에 처했다. 빈사지경의 환자인 암각화를 두고 치료를 ‘이렇게 하자’ ‘저래 하자’는 논쟁으로 근 20여년을 끌고 오면서도 여전히 티격태격이다. 바위 그림이라서 그렇지 사람이라면 아마 몇십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1995년 국보로 지정된 암각화는 그윽한 산세에 둘러싸여 주변은 천혜의 절경을 이룬다. 암각화 하단부에는 사람, 짐승 등 그림 296점이 새겨져 있고, 특히 58점의 고래와 고래사냥 그림은 선사인들이 인류 최초로 거친 바다를 누비며 고래를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인 포경(捕鯨·고래잡이)의 역사를 보여 준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2009년 4월 ‘문화재의 공익·경제적 가치 분석 연구’ 보고서 발표에서 반구대 암각화를 문화재 중 ‘으뜸이라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암각화의 연간 경제적 가치는 4926억 원에 달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 3079억 원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

이 암각화가 1965년 하류에 식수원인 사연댐이 건설된 이후 해마다 물속에 잠기고 있다. 최근 3년간 연평균 69일 동안 물에 잠겼다. 지난달에도 태풍(난마돌, 힌남노) 탓에 잠겼다. 침수와 부식 등으로 바위 그림은 점점 희미해졌다. 전문가들이 7000여 년을 견딘 암각화이나 침수와 노출, 침식이 해마다 반복되면서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한지도 오래됐다. 

암각화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데는 문화재청과 울산시의 탓이 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재청은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해 물 높이를 낮출 것을 요구하는 안을 내놓았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자 울산시는 “어림 턱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수위를 낮추면 식수가 위협받는다고 난리를 쳤다. 민선 8기 울산 시정을 책임지고 있는 김두겸 시장도 “식수 대책 없이는 어림없다”고 발끈한다. 

양 측의 접점없는 평행선에 정치권이 해법을 내놓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암각화를 다녀간 유력 정치인들은 한둘이 아니다. 정치인들은 방문 때마다 암각화를 물속에서 구해내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10년간의 기록만 봐도 여야 대표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치인들이 단골손님으로 암각화를 찾았다. 2020년 10월 울산 첫 국정감사는 암각화 현장에서 시작되기도 했다. 정부도 거들었다. 지난해 10월께는 국무총리가 암각화를 찾아 선물보따리를 풀었다.

그런데 웬걸, 결과는 모두 공수표 남발이다. 뾰족한 암각화 보존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유네스코 등재도 차질이 예상되는데, 단골손님들 방문때마다 수행하고 있는 역대 문화재청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해 2월 우선등재목록에 선정된 암각화는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2025년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목록에 올리겠다고 밝혔었다.

그동안 울산시가 암각화 보존을 위해 애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생태제방, 유로변경, 카이네틱댐(임시 물막이) 설치 등 다양한 방안을 논의하고 모형실험도 가졌다. 그런데 번번이 거액의 예산만 날린 채 흐지부지됐다.

어렵사리 올해 4월 나온 보존책도 대구와 구미 간 두 지자체의 물싸움으로 물 건너갈 판이다. 사연댐 수위를 낮추는 수문(3개)을 설치하고, 대신 부족해진 울산 식수는 경북 청도 운문댐 물을 끌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해평취수장 공동 이용 문제를 두고 구미와 갈등을 벌인 대구가 최근 관련기관 간 협정을 공식 파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울산시는 수문 설치는 식수 확보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물 확보가 되지 않는 이상 진행하기가 어렵다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 “정부가 중재에 나서 암각화를 물에서 꺼낼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암각화 훼손 문제는 어제 오늘 일 아니다. 살리자고 한 게 벌써 20년이 더 됐다. 그러는 사이 암각화는 상당 부분 망가졌다. 물길 돌리든, 수위 낮추든 빨리 물에서 건져 올려야 하는데 한세월 논쟁이다. 이러다 언제 보존책을 강구할지 모르겠다.

불쌍한 암각화, 후손 잘못 만나 개고생이다. 선사시대 조상들 땀 흘려 그려줬더니 21세기 후손들 보전도 못하고 빈사상태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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