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전재산 8만원 시작해 연매출 30억 ‘확’ 키운 ㈜보람케터링 남세환 사장
〈4〉 전재산 8만원 시작해 연매출 30억 ‘확’ 키운 ㈜보람케터링 남세환 사장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3.01.18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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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 두부, 콩나물 배달에서 대학교수, 대한민국 신지식인 되기까지

-두부 세 판, 콩나물 한 시루로 시작해
-각광받는 외식업계 사장으로 거듭나고 
-경영 분야 대한민국 신 지식인상 수상
-대학교수로 강단에서 후배양성에 매진
전재산 8만원으로 시작해 연매출 30억 회사를 키운 남세환 사장.
전재산 8만원으로 시작해 연매출 30억 회사를 키운 남세환 사장.

이때쯤이면 감나무 끝자락에 제 몸 다 내어주고 껍질만 처절하게 붙어있는 감 홍시의 순교적 의미가 가슴 아리게 한다. 어쩌면 계절의 우울증이 되살아나는 듯한 지난 달 20일 동장군보다 강인한 기상과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남세환 사장을 남구 삼산동에 위치한 그의 회사에서 만났다.

남 사장은 1989년 33년 전 청송에서 혈혈단신 울산 장생포로 내려와 두부 세 판, 콩나물 한 시루로 수산물 시장을 누비며 장사를 시작해 현재 연매출 30억 원에 달하는 ㈜보람 케터링 대표다.

어려서부터 이유를 모르는 병으로 다리를 절었던 그는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고 유년시절을 방황하며 보냈다. 부모님은 병명도 모른 채 답답한 심정으로 아이의 병을 고쳐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 시절의 의학으로는 치료가 어려웠다. 마음의 상처가 자라고 있던 때 미술선생님은 키다리 아저씨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미술적 재능을 발견한 선생님은 그림을 그려보라고 제안을 했고, 교사들과의 식사자리에도 불러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석에서 만나 사제지간으로서가 아닌 인간관계를 맺은 선생님들께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학습태도는 달라졌고 따라서 학교생활도 즐거워졌다. 불우한 학창시절에 좋은 멘토가 되어 주고 양지로 이끌어 주신 미술선생님을 그는 생애 최고의 은인으로 뽑는다.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포항수산전문대를 졸업한 남 사장은 포항의 양어장에서 일을 배웠다. 양어장 일이 녹록치 않아 건설회사로 이직한 후 중견 간부로 승진할 만큼 열심히 일해 인정을 받았지만 개인적인 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후 1989년 추운 겨울 석유화학공단과 자동차, 조선소 등 공업도시로 알려진 울산에는 취업이나 먹고 살기가 나을 것이란 생각으로 학연, 지연도 한 명 없고, 지리도 모르는 장생포에 느닷없이 정착했다. 전 재산이 8만 원이었던 그는 생각할 여지없이 당시 월세가 가장 싼 변두리 지역인 장생포를 선택했다.

“그날도 오늘처럼 추운 겨울”이라는 그는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며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전 재산 8만 원으로 두부 세 판, 콩나물 한 시루와 낡은 소형 경운기 한 대를 빌려서 무턱대고 장사를 시작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하고 겁 없는 도전이지만 그에게는 생계가 달린 처절함이 담겼다.

고작 두부 세 판으로 불투명하게 시작한 장사는 점점 고객이 늘었고 두부직매장으로 확장하게 되었다. 고객이 늘어난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했다.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이득보다는 양심적으로 한 것이 고객에게 믿음을 주었다. 경운기 기름 값, 일당도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 결과 거래처가 늘고 일손이 바빠졌다.

본격적으로 장사를 하면서 상인들이 물건을 담아주는 비닐봉투의 쓰임새가 다양하고 수요가 엄청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급기야 부산에서 비닐봉투를 공급받아 판매에 이르렀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비닐봉투의 한 묶음 개수가 당연히 100개인 걸로 믿고 바쁜 일과에 쫓겨 세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기에 함정과 묘수가 함께 도사리고 있었다. 남 사장은 다른 곳에서 납품 받은 비닐봉투의 숫자를 일일이 세어 보여주고 개수가 부족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켰다. 그는 비닐봉투 개수를 속이지 않고 신뢰를 판매 전략으로 삼아 고객층을 늘려갔지만 쉽게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그 행간에는 간과하고 있었던 큰 실책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장사치는 장사를 시작하지 않은 이른 아침에 비닐봉투를 판매하러 다니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장생포에서 동강슈퍼를 하시던 할머니가 장사치는 돈이 안 들어왔는데 돈 나가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비닐봉투를 아침에 팔러 다니지 말고 오후에 시작하라고 충고를 했다. 그때 나는 무릎을 탁 치면서 타이밍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인생에는 타이밍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할머니의 조언대로 오후부터 비닐봉투를 돌리자 불티나게 팔렸고 장생포 시장에서 야음시장, 수암시장, 병영시장, 역전시장까지 영역이 확대되었다.
“내 생애 두 번째 은인이 바로 동강슈퍼 할머니”라고 말하는 그는 “할머니의 충고가 아니었다면 실패의 원인도 모른 채 생계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연륜에서 묻어나는 삶의 지혜였으며, 그에게는 값으로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자양분이 됐다.

“1990년 역전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분들이 현재 삼산동 농수산물 상가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몇몇 분은 이전하지 않고 정든 역전시장 자리를 고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생각했던 대로 이전하지 않은 분을 찾아가 그 자리를 나의 몫으로 달라고 부탁했다. 그 자리를 배정받아 ‘남식품’이라는 상호를 걸고 부식 납품을 시작했다. 그 곳에서 소매동 총무로 2000년까지 10년 정도 일을 했다.” 

그는 40세가 되던 해인 2001년 꿈에 그리던 ㈜보람 케터링을 창업했다. 보람을 회사명으로 한 것은 열심히 일해서 보람을 찾자는 의미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직원 1명으로 창대한 내일을 꿈꾸며 미약한 시작을 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외식업을 시작하려면 그에 관한 충분한 지식과 자격증이 필요할 것 같아 영산대학교 외식경영학과에 편입해 공부를 했다. 6년 후 석사학위를, 10년 후에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끊임없는 그의 노력으로 회사는 매년 발전했고 외식업계에서 각광받는 기업이 되었다. 직원이 120명에 달할 때도 있었지만 코로나19로 잠시 주춤해 지금은 80여명 정도로 활발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 회사는 직접 설계, 도안할 만큼 나의 삶이 녹아 있다. 사업 확장 당시 현재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모두가 곤란한 지분의 땅이라고 말렸지만 끝까지 지주를 찾아가 설득하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완성했다. 전 재산 8만 원에서 지금까지 오는 데는 지혜, 힘, 용기, 현안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고 그만한 노력의 대가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빛과 희망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잊은 적이 없다”며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진 듯했다.

그는 회사의 발전에 감사하는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 봉사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모교에 장학금 전달과 다문화 가정의 불우한 학생에게 미술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는가 하면 여러 단체에서 다방면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인터뷰 내내 매우 저돌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이 넘쳐났다. 내면의 높고 단단한 꿈과 기상이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장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또한 거침없는 그의 성격은 실수나 실패를 오랫동안 머물게 하지 않고 성장의 디딤돌로 삼아 새로운 기회로 만드는 자양분이 되게 한다. 그의 진취적인 성향은 아내와의 만남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러브스토리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남세환 사장의 사무실에는 역대 시장으로부터 받은 표창장과 상장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남세환 사장의 사무실에는 역대 시장으로부터 받은 표창장과 상장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남 사장은 2014년께는 경영분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신지식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신지식인 회장에 선임된 그는 수많은 젊은 지식인들이 뿌리를 내릴 때까지 자주 만나 기술과 지식을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고 자립할 때까지 용기와 격려,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사무실 서재에는 역대 시장으로부터 받은 표창장과 수많은 상장이 인생의 발자취가 되어 고스란히 빛나고 있다.

그는 현재 모교인 영산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인성을 가르치는 선배가 되고 싶어할 만큼 후배 양성에 대한 기대 또한 누구보다 크다. “나보다 더 치열한 경쟁사회에 사는 후배들은 설 자리가 좁고 자존감이 낮은 터라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며 후배들을 향한 애정은 남달랐다. 그는 학생들에게 교과서적인 지식보다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을 헤쳐 나가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일에 방점을 두고 지도한다.  

“나는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다. 물질적인 욕심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길 바라는 욕심이다. 나를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보답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그는 “앞으로도 힘든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싶다”고 각오를 밝혔다.

사무실 입구에는 드나들며 되새길 수 있도록 ‘남세환 답게 살자’ 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한 순간도 초심을 잃지 않고 바른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마음을 다지고자 함이다. 생각해보면 요즘 신조어 ‘알빠임’을 먼저 실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상대가 아무리 위대하고 화려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남세환 다움’의 소신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계를 모르는 그의 추진력, 진취적인 기상이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잘 전달되어 결코 녹록치 않은 세상살이에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바람대로 그의 발자취가 많은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의 선구자 역할이 되었으면 한다.

올해 60세가 된 남 사장은 지금도 왕성하게 사업은 물론 봉사,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계묘년 새해를 맞아 큰 귀와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토끼처럼 주변의 여러 소리를 경청하고 눈앞에 냉엄하게 전개되는 흐름을 잘 살펴 큰 도약을 하는 해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나뭇가지에 아슬아슬 매달린 감 홍시를 보며 문득 그의 나눔과 봉사정신을 떠올려 본다, 남세환다운 그의 일상이 또 어떤 훌륭한 족적으로 남을까 하는 기대감이 새해 아침 맑은 겨울 하늘에 그려진다. /칼럼니스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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