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쪽 분량 ‘박상진 의사’ 추가자료 일본서 발굴
600쪽 분량 ‘박상진 의사’ 추가자료 일본서 발굴
  • 정두은 기자
  • 승인 2023.08.1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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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선고한 1심 판결문 포함
박 의사 부친의 구명 청원에
日각료 심의한 조사서도 발견
동생 박하진옹 활약도 첫 확인
박상진 의사의 사형 확정 이후 부친의 구명 청원으로 일본 내각의 각료 전원이 서명한 심사조사서.
박상진 의사 부친이 쓴 '구명청원'에 대한 당시 일본 정부의 조사서. 이 조사서엔 일본 각료들의 직인등이 담겨 있다. 사진=박상진 의사 증손 박중훈씨.

[울산시민신문] 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울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고헌 박상진(1884~1921) 의사가 순국하기 직전 가족들이 구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자료와 판결문 등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공개된 자료는 일본 현지에서 발굴한 자료 가운데 극히 일부이나, 번역과 공증을 거치면 서훈 상향을 추진 중인 박 의사의 업적을 증명할 귀중한 증거 자료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14일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가 공개한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박 의사의 사형 집행을 두고 일본 내각이 여러 차례 회의를 열었단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박 의사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가 구명 청원을 넣었고 총리와 장관 등이 이를 심의한 것이 확인됐다.

또 국내에서 유실된 공주지방법원의 사형 선고 1심 판결문과 박 의사의 친동생이 옥중의 동지들과 연락을 돕다 실형을 받은 판결문도 잇따라 발견됐다. 박 의사의 공주지법 1심은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919년 2월28일 열린 재판이다. 박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이 재판의 판결문은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찾았다. 

동생인 박하진 옹의 판결문도 있다. 박하진 옹은 일본인 간수를 포섭, 수감 중인 형에게 ‘필기구’를 전달했다. 박 의사는 이 필기구를 통해 수감된 독립운동 동지들과 계속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박하진 옹은 필기구 제공 사실이 들통나 체포된 뒤 1918년 9월 1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가 지난 2년간 일본 현지에서 찾은 자료는 무려 600쪽 분량에 이른다. 

공주지방법원의 1심 판결문.
공주지방법원의 1심 판결문. 사진=박상진 의사 증손 박중훈씨.

박 의사의 증손인 박중훈 박상진추모사업회 학술자문위원은 “민감한 자료들은 일본에서 모두 공개하지 않고 있어 안타깝고 애석하다. 행정 문서로 작성된 서류라 번역에 많은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다만 광복회에서 맺어진 선대의 동지적 관계가 후손까지 연결돼 결실을 보았기에 반드시 모든 자료를 번역해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집을 출간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박 위원은 “이번에 처음 박 의사의 동생인 박하진 옹의 업적도 확인했다.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른 시일 내로 서류를 갖춰 국가보훈부에 포상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박 의사는 판사시험에 합격했지만 식민지 관리는 되지 않겠다며 가산과 젊음을 바쳐 광복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아 1921년 8월 11일 37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1910년대 결성된 전국 규모의 항일 비밀결사단인 광복회는 1915년 7월 15일(음력)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설돼 친일부호 처단, 일제세금 탈취 같은 활동을 벌였다. 조선 총독 암살도 기도했다. 

이 같은 업적에 비해 박 의사의 예우가 턱없이 낮다는 안팎의 지적 속에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는 지난 2년 동안 자료 발굴에 나섰고, 일본에서 30여 건 600쪽에 달하는 자료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들은 공적에 비해 제대로 예우를 받지 못해 서훈 3등급 독립장에 머무르고 있는 박 의사의 서훈 상향에도 큰 힘이 될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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