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가난한 행복을 추구하는 ‘수상한 이웃’ 여장가수 추미래
〈16〉 가난한 행복을 추구하는 ‘수상한 이웃’ 여장가수 추미래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3.10.26 15: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극빈의 환경에서 베푸는 삶
물욕을 벗으니 마음은 부자
봉사로 삶의 응어리 풀어내
기쁨을 셈하는 아름다운 삶 
불우이웃돕기 모금 자선음악회에서 열창하는 추미래 여장가수.
불우이웃돕기 모금 자선음악회에서 열창하는 여장가수 추미래.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죠. 저도 술에 취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며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도 압니다. 구걸해야 할 정도의 빈곤, 극빈은 악덕입니다. 가난 속에서 타고난 영혼의 고귀함을 여전히 간직할 수 있지만 극빈의 상태에서는 결코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스토엡스키가 쓴 죄와벌의 한 대목이다.

이마에 착색되는 주황빛 타는 노을이 더욱 애달프게 물들인 가을날, 북구 호계로의 음악실에서 만난 추대성 가수는 추미래라는 여장가수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의 삶은 봉사로 물들인 기쁨으로 채색되어 간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 현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찌든 가난을 경험했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에는 늘 빚쟁이가 찾아와 부모님을 괴롭혔고 어린 형제들은 그런 광경을 거의 매일 지켜봐야 했다. 가난에 한이 맺힌 그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고향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과 부모님처럼 살지 않겠다는 의지로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셨고 젖이 나오지 않아 나는 시장에서 젊은 아낙네들의 젖동냥으로 겨우 어린 생을 버텼다”고 한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부모님의 가난을 되 물림 하지 않으려고 어렸을 때부터 돈이 생기면  작은 돈도 저장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을 건너뛰고 4학년으로 월반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진 아이었다. 5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 한 후 하루 왕복 차비가 2원이었는데 그 돈마저 없어 학교를 포기하고 말았다. 학업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갖은 일을 하면서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분야별 도서를 습득했다.

“나의 결혼은 500원으로 시작했다. 부끄러울 정도로 가난하게 출발하지만 꼭 성공하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이 나를 채찍질했다”며 피할 길 없었던 아픔을 반추했다. “누구보다 아끼고 저축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내 삶은 나를 평안하게 내버려두지 않았고 가난은 죄가 되어 가족과 이별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솟구치는 슬픔을 참았다.

“돈을 빌려간 사람이 갚지 않아 집으로 찾아갔더니 사는 모습이 딱해 보여 돈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가지고 있던 돈 30만원을 주고 왔다”며 가족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 후 동서남북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 스스로를 모욕하며 선술집에 기대어 보기도 하고 몇 차례의 극단적인 선택을 했지만 모진 생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며 쇠락한 지난날을 회상했다.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파지를 주우며 지나가는 할머니 한 분이 나보다 훨씬 초라하고 처량해 보여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드렸다”고 한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내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어주고 나니 오히려 부자가 된 것 같아 생각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며.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데는 분명한 이유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기타를 즐겼고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노래로 힘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길을 선택했다.

부산 시민과 함께하는 한마음콘서트에 초대가수로 초청되어 열창하는 추미래 가수.
부산 시민과 함께하는 한마음콘서트에 초대가수로 초청되어 열창하는 여장가수 추미래.

■물욕을 벗으니 마음은 부자

희망 없이 살아가던 삶을 멈추고 2004년 2월7일 ‘불우이웃돕기 운동본부’를 출범하고 요양원과 경로당을 다니며 어르신들을 위한 음악봉사를 했고 크고 작은 수입이 생기면 동사무소와 북구청을 찾아가 전달했다. 지금은 사랑의 열매를 통해 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그는 1급 기초수급자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기탁하는 것이다. 그는 “가난해보지 않으면 그 설움을 모른다”며 “나는 20일 정도 굶어 보았고, 노숙자 생활도 해 보아 가난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잘 안다”면서 “그런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 행복하다”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지금은 오히려 가진 것이 없어서 행복하다”며 “내 삶이 다 하는 날까지 봉사활동을 이어갈 것이다“고 마음속 깊숙한 소회를 밝혔다. “물욕을 벗어버리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전국에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그의 손길은 분주하다. 경북 울진 산불 피해로 이재민이 발생 했을 때, 포항 지진 피해로 많은 사람들이 시름에 잠겼을 때도 그는 어김없이 나타나 온정의 손길을 베풀었다. 또한 위드 코로나 당시 마스크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직접 마스크 공장을 찾아가 마스크 4000장을 구입해서 천막을 치고 무료 나눔 행사를 했고 우리 농산물 팔아주기 운동의 일환으로 쌀 50포대를 사서 기부하기도 했다. 그 후 부산, 밀양 등의 봉사단체에서 벤치마킹을 하고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욕심을 버리고나니 부러운 것이 없었고 마음은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점차 뜻을 같이 하는 회원이 늘어나고 더 활발하게 봉사단체를 이끌어 갈 수 있을 때쯤 그는 직장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나에게 행복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는가 하고 자포자기 하고 있을 때 팬들과 봉사단체 회원들은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병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것은 모두 구해왔고 어떤 분들은 영험하다는 돌 할매한테 소원을 빌고 돌을 들었더니 들리지 않더라. 그러니 꼭 건강을 회복할 거라는 희망적인 말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며 “그분들의 정성에 감동하고 꼭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면서 평소에 공부했던 약초들을 스스로 분석하고 조제해 물을 끓여 매일 복용했다고 한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쇠락한 순간 격려와 응원의 한 마디가 나를 살려 3년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완치 판정을 받았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지만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최고의 기쁨이고 보람이다”며 “더욱 봉사활동에 매진하고 성금이 모이면 지역 어르신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베풀고 요양원을 찾아가 기쁨을 드리고 싶다”며 불행의 근원을 찾아 가시를 뽑아낸 것처럼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여장가수로 변신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

꿈과 희망이 점점 멀어져 가던 고락의 순간,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나 큰 시련이라고 생각했다. 장발을 즐겨했던 그에게 누군가가 여장을 하면 예쁠 것 같다는 말에 솔깃했다. 남자로 살면서 힘들었던 삶을 여자가 되어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낯설지만 신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여장가수로 변신해 무대에 섰을 때 부끄럽고 자신감도 떨어졌지만 더 큰 호응과 박수가 터져 나올 때 큰 위안이 되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추미래라는 여장가수로 활동하면서 분에 겨운 인기를 얻게 되었고 ‘수상한 이웃’이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섭외 요청이 왔다. 또한 각종 행사에 초대되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그는 출연기회가 많아지면서 수입이 늘면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으로 힘든 것도 잊은 채 나날을 즐기고 있다.

“여장가수 추미래는 나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고 죽을 때까지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가라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며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돈보다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나는 타락한 부유함보다 가난한 행복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고 하는 그는 세상의 가장 큰 행복을 마주한 얼굴이었다.

그는 ‘어차피 떠난 여인’, ‘날더러 어쩌라고’, ‘못 잊어서’ 세 곡을 작사했다. 이 노래는 모두 가난 때문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가족, 거리를 헤매도 잊히지 않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만든 곡이라고 한다. 지금 그에게 가장 빛나고 소중한 꿈은 더 많은 분들에게 그의 손길이 닿아 행복을 전달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의 신비는 단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가치를 찾는데 있다’고 했다. 그는 봉사를 통해 삶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동시에 누구보다 값진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일흔 하나의 나이테는 아픔과 상처로 굴곡져 있지만 속박에서 벗어나 감흥 없고 미래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을 여장가수로 거듭나면서 참된 의미로 가득 메우고 있다. 극빈의 상태에서 오히려 타고난 영혼의 고귀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베푸는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아티스트다.

트로트 가수 협회 및 이웃사랑 운동본부 총괄본부장을 맡고 있는 우리들의 ‘수상한 이웃’ 추미래씨가 앞으로 건강하고 빛나는 삶을 살아가길 응원한다. / 칼럼니스트·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