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되고 있는가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가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3.12.0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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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적 권력욕과 오만의
임계점을 향한 질주

가치전도의 일상화와
역사의 비극적 응보
김정배 논설위원
김정배 논설위원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친숙한 일종의 격언이다. 굳이 역사철학을 논하지 않아도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유형적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대개 희망 섞인 사례보다는 참혹한 비극을 예감하거나 목도할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 9.19 남북 군사합의 파기와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정부의 대외정책은 애당초 목적과 방향을 잃고 있었고 언론과 사회 전반에 대한 황당한 탄압과 무도한 억압은 1970년대를 방불케 하는 퇴행적 행태라는 지적이 많다. 사회적 대폭발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는 느낌이 드는 이유다. ‘10월 유신’을 전후하여 미국 또한 박정희의 행보를 주시하면서 유사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으로 미국의 칭찬과 신뢰를 한껏 받고 있던 한국정부는 느닷없이 유신 발표 하루 전날 하비브 대사에게 계획을 통보했다. 1971년 12월 6일 북한의 침략 위협 대비를 구실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8개월 뒤에는 태도를 확 바꿔 북한과 손잡고 평화통일을 추구하자는 7.4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그리고 단지 3개월 뒤에는 국가비상사태선언 때처럼 국제적 안보환경 변화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냉전이 반영된 기존 헌법의 한계를 들먹이고 통일 사업 추진에 적합한 헌법으로 개정한다며 유신을 단행한 것이다. 당시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박정희의 그런 결정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미국의 반응도 거의 분노에 가까운 것이었다. 
대통령 특별선언문 초안 내용 중 특별히 미국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강대국들이 제3국이나 중소 국가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는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라는 대목이다. 유사한 인식에 기초한 국가비상사태선언 때에도 미국은 그 점을 거칠게 지적한 바 있었다. 그런데 유신 때는 이미 중국과 미국이 공식적으로 화해했고, 한국과 미국은 그 의미와 여파에 대해 충분한 교감을 나눈 뒤였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의 그러한 국제정세 인식과 종신 독재체제 구축 시도를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직접 도전”이라고 판단했다. 

10월 17일 오전 김동조 대사는 한국 입장을 전하기 위해 존슨 국무차관과 그린 아태담당 차관보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존슨은 유신 움직임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한국의 정치적 안정에 비추어 “유신은 불필요하다”라는 미국의 믿음을 강조했다. 존슨은 또한 이승만이 “폭발에 이를 때까지 한국인에 대한 통치를 강화했다”라는 점을 김 대사에게 상기시키면서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라는 우려를 덧붙였다.

미국이 그러한 판단과 우려를 내보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한국의 안보 보장을 닉슨의 친서 전달을 포함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 되풀이 확인해주었고, 김일성은 청와대 습격 사건이 ‘좌파 모험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며 박정희에게 ‘심심한 유감’을 전했고, 향후“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더구나 미국 ·중국 · 러시아가 한국과 북한의 행동을 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동안 한국이 받아온 국내외의 지지와 신뢰를 희생하면서까지 독재체제를 밀어붙일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미국의 박정희에 대한 불신은 정권의 태생적 성격 탓도 있었으나 북진(北進)을 시사하는 듯한 그의 발언 또한 한몫했다. 1968년 6월 미군 2개 사단 철수와 유엔사령부의 한국군 통제를 포기할 계획을 검토할 때 그것이 한국의 무력 통일 시도 위험성을 높이지 않을까 우려한 점, 존슨 차관이 박정희의 특별선언문에서“만약 국민투표로 개헌이 거부된다면 통일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취할 것”이라는 표현을 놓고“이승만의 북진 성명처럼 불길하게 들린다”라고 말한 점, 1971년 11월 키신저가 저우언라이에게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동안 남한의 군사적 공격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 점 등은 모두 박정희의 군사적 모험에 대한 의심의 표현이었다. 미국의 그러한 태도는 주한 미군의 역할이 북한 위협에 대비할 뿐만 아니라“지역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전략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자신이 ‘추단한’ 안보위협을 고집하고 그 안보‘유령’을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망상과 오만에 갇혀 역사와 국민에게 테러를 자행하면서 영구집권을 획책했다. 미국은 유신이 내포한 비극적 결과를 예감하고 미국 이익의 유지라는 차원에서 공식적으로는 유신과 ‘무관’하며 한국의 ‘국내문제’라는 견해를 밝히며 한국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박정희와 유신은 시대착오적 국가권력 행사가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뼈아픈 교훈을 준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신뢰받고, 반대파가 좋은 의견을 내놓아도 무조건 부정하고, 남의 약점을 이용하는 사람이 영리하게 여겨지고, 함께 행한 비리에 기초하여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온갖 불법과 무도함이 당연시되는 가치전도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아마도 새로운 사회문화로 자리 잡는 중이다. 공권력이 그런 병적 상황을 부추기거나 숙주(宿主)가 되고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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