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음 생애도 대장장이로, 68년 외길인생 박병오옹
〈19〉 다음 생애도 대장장이로, 68년 외길인생 박병오옹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3.12.28 13: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3세 부터 시작, 81세가 된
울산 마지막 대장장이의 꿈
나를 찾는이 단 한명이어도
기다림을 택한 위대한 장인 
지난 11월의 마직막 날, 울산 울주군 언양읍 매일대장간에서 쇠를 달금질하며 활짝 웃고 있는 박병오 옹.
지난 11월의 마직막 날, 울산 울주군 언양읍 매일대장간에서 쇠를 달금질하며 활짝 웃고 있는 박병오 옹.

어느새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이 지나온 한 해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게 한다. 아쉬운 듯 마지막 잎새를 헤는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겨울의 예고편이듯 가장 추운 영하의 날씨에 찾아간 곳은 언양전통시장내 언양 매일대장간이다.

대장간 옆 햇살이 가장 가득한 곳에서 언 손을 녹이고 있는 울산의 마지막 남은 대장장이 박병오 선생님을 만났다. 오랜 세월 쇠를 만지는 작업으로 투박한 손은 나무껍질처럼 딱딱하고 거칠었으나 얼굴에 비친 환한 웃음과 대화에서 느껴지는 내면은 쇳물의 성질을 닮았는지 물처럼 유연하고 소탈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먹고 살기 위해 13세에 무작정 대장간을 찾아가 허드레 일을 하며 밥 배라도 채우려고 배우기 시작한 일이 81세인 지금까지 한눈 팔지 않고 오직 대장장이로 외길인생을 살아왔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궁핍한 살림에 늘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농기구 만드는 기술을 익히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 될 것이라 생각하여 입 하나라도 덜어 보려고 시작한 것이 계기다.

“어린 나이에 쇳물 솥에 화력을 조절하여 풀무를 당기는 기초적인 일부터 시작했는데 몸은 작고 힘이 없어 잘 되지 않아 무척 힘들었다”며 “가끔 나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있어 용기를 냈다”고 회상했다.

■ 풀 한 포기가 주는 교훈

“19세쯤 이 일에 권태가 왔다”며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여름에 큰 해머로 두들겨 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땀으로 적셔진 옷을 짜서 입을 정도로 노동의 강도가 엄청난 작업이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쉬는 시간에 땀을 식히려고 잠시 밖으로 나왔더니 여름 뙤약볕 돌 틈 사이로 풀 한 포기가 눈에 들어왔다”며 “햇빛에 축 늘어져 있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는 여린 풀 한 포기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한낱 풀도 견뎌내는데 하물며 인간이 좌절해서야 되겠냐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고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들어와 일을 시작했고 천 갈래 만 갈래 이는 생각을 부여잡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의지가 지금까지 이 일을 멈추지 않고 할 수 있었던 자양분이 되었다”며 잠시 방황했던 때를 반추했다.

농경사회였던 당시 농기구를 외상으로 사고 추수 때가 되면 쌀로 그 값을 치르는 ‘미성냥’이라는 것이 성행했다. 쌀자루를 지고 외상값을 받으러 다니면 자루에 점점 쌀은 채워져 무거워져도 그만큼 희망도 늘어갔다. 끼니도 그르고 이 집 저 집을 다니던 중 어느 집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마루에 놓여 있는 숭늉 그릇이 눈에 띄었다. 물 그릇 밑에는 숭늉이 가라앉아 있었고 그 숭늉을 보자 허기가 허기를 밀어내 버틸 힘조차 없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더니 선뜻 물그릇을 내어 주었다. 그릇에 가득 담긴 물을 다 마셔야 바닥에 있는 숭늉을 먹을 수 있어 그 물을 억지로 마셔 허기를 달랬다고 한다.

 “누구나 힘들게 살았던 시절이었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흐른다”며 “지금은 버리는 음식이 태반인 시절이 되어 소중함을 잊고 산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저수지에 비가 여간 내려도 늘어난 것을 모르듯 하루하루 힘들게 기능을 배우며 자신도 모르게 기능이 진보되는 시기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기능을 익혀 대장장이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여전히 팍팍했다. 군대 복무기간 3년을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월급이 오르지 않아 가족을 부양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살아갈 방법을 찾던 중 호계에서 대장간을 하던 사람이 일을 그만두게 되어 호계 오일장인 1일, 6일에는 호계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호계 오일장과 울산대장간 일을 병행하며 열심히 일을 해 나가던 중에 울산 대장간에서 더 이상 일을 같이 할 수 없다며 당장 그만두라고 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호계 오일장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웠던 그는 “1년만 더 할 수 있게 봐달라고 매달렸지만 헛수고였다. 하늘을 원망하며 집 앞까지 울면서 왔다”며 지금도 북받치는 설움이 차올라 눈물을 글썽였다.

■ 언양종합시장에 터를 잡다

그 일을 겪은 후 이주하게 된 곳이 처가가 있는 언양이다. 언양 오일장에서 대장간을 시작했지만 그마저 순탄치 않았다. 대장간의 소음으로 민원이 들어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철거하게 되었고 언양종합시장을 건축하면서 대장간이 있어야 시장이 활성화 되고 농민들의 왕래가 많을 것이라 판단해서 대장간을 먼저 입주시켜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언양종합시장인 이 곳에 터를 잡아 쉬는 날 없이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며 시작한 것이 오늘까지 꿋꿋하게 외길 인생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간판에는 전통 이라는 두 글자의 수식어가 붙어 있다. 그는 “전통이란 글자는 두 음절이지만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며 지나온 세월을 더듬었다.

“쇠는 흙, 나무, 음식 등 쓰임에 따라 강도와 각도가 다르다. 그 경지를 넘어서야 비로소 전통을 잇는 대장장이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쇠는 나에게 가족보다 소중한 친구이고 연인이다”며 “내 말을 안 들으면 망치로 한 대 더 맞기 때문에 말을 잘 듣는다”며 “사람이나 쇠나 닮은 점이 많다”면서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삼남매를 잘 키운 그는 대장간은 아침밥만 먹고 나면 나와서 노는 가장 즐거운 놀이터이고 쉼터”라며 지금도 추석 이틀, 설날 이틀, 일 년에 4번 밖에 쉬지 않는다고 한다. 

“대장장이 기술은 특별한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인내하면서 세월과 더불어 습득하고 오롯이 나의 감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칼, 낫, 호미, 괭이 등 농기구를 정성껏 만들어 판매되면 자식을 출가시키는 느낌”이라며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무쇠는 방치하면 녹이 슬고 녹이 슬면 고철이 되는데 우연히 고물상에서 발견하게 되면 시집살이를 고되게 했겠다는 연민의 정이 든다”며 주워 와서 깨끗하게 닦고 수리를 해서 새것으로 만들어주어 그동안의 고생을 어루만져 준다. 사물을 연민으로 소통하는 방법이 특별하면서 아픔을 달래주려고 노력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내가 만든 물건을 사 간 사람이 써보니 참 좋더라는 말을 할 때 망치질 하는 팔에 힘이 솟는다”고 하면서 “이 일을 하는 동안 아프지 않고 지속하기 위해 건강은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건강관리를 위해 아침에 일어나면 푸시업 100개, 출근해서 푸시업 150개를 한다”고 해서 81세의 나이라는 것을 무색하게 했다.

■ 서산에 해가 지니 허무함도 밀려와

그가 만든 물건에는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오’자를 새겨 넣어 다른 제품과 차별화를 둔다. 다른 것과 바뀌었을 경우 시비 거리를 만들지 않겠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자신의 삶 자체인 이 일에 대한 보람과 성취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생애도 대장장이가 되고 싶다는 그는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쇠는 내 말을 잘 듣고 순응하므로 어떤 이유로도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며 “나는 대장장이어서 참 행복하다”며 앞으로의 삶을 직조했다.

지금 그의 나이는 81세다. “서산에 해가 보이니 허무함이 밀려 올 때도 있다”며 오직 한 길을 걸어 온 지난날을 회상했다. “보석 같은 아내를 만났으나 고생을 시켜 몸이 많이 망가졌다”며 “인생의 뒤안길에 선 지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다“고 함께 한 세월을 반추했다. 

언제까지 대장간 일을 할거냐는 물음에 일초의 망설임 없이 한결같은 대답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 공산품이 활개를 치지만 대장장이인 나를 찾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작은 공간에서 나는 기다리겠다”며 “돌 틈 사이의 작은 풀을 보며 나를 이겨내고 이 어려운 기술을 연마한 것은 나를 찾는 사람에게 베풀라는 뜻이다”면서 가슴 깊숙이 간직한 진심을 보였다.

“언제 나를 찾는 사람이 올지 모르기에 나는 오늘도 문을 닫지 못하고 여기서 기다린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서녘의 붉은 낙조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질그릇처럼 투박한 손은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그의 손은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켜온 값진 훈장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 대장장이의 팔뚝에 힘이 솟는다“고 할 만큼 대장장이의 일은 중요했으며 역사의 소중한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그는 울산을 지키는 마지막 대장장이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일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지금 묵묵히 이 일을 지켜 온 그에게서 존경심이 이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한결같은 인생관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건강하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본다. / 칼럼니스트·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