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고결한 정절의 표징, 은장도에 반하다‘ 임동훈 장도장
〈20〉‘고결한 정절의 표징, 은장도에 반하다‘ 임동훈 장도장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4.01.1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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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공예대전 첫 출품작 입상
사고로 한 손으로 작업하지만
더 격조있고 아름다운 멋으로 
울산 은장도의 맥 이어가고파
고려민예사에서 담담하게 은장도에 몰두하고 있는 임동훈 장도장.
고려민예사에서 담담하게 은장도에 몰두하고 있는 임동훈 장도장.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몸에 칼을 지니는 풍습이 있었다. 성인이 되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한 뼘 정도 되는 칼을 지니게 되는데 이 칼을 장도라고 부른다. 남자는 허리춤에 찬다고 하여 낭도라 했고, 여인은 가슴에 달아 패도라 불렀다. 특히 여인은 장식용뿐 아니라 절개와 지조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정조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표징’으로 시집가는 딸에게 마련해주는 필수적인 혼수품이기도 했다.

박종화의 소설 ‘목 매이는 여자’에서 성삼문, 이개 등은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였는데 신숙주는 형제처럼 지낸 이들과 함께 하지 않고 절의를 저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신숙주의 처 윤씨는 부끄러운 마음에 스스로 은장도로 자결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울산의 은장도가 유명한 것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지역으로, 특히 중구 병영동 일대는 조선 태종 17년 (1417년)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중요한 군사기지였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철 생산기지인 달천철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군수산업과 생활용구 등의 제조가 성행했던 곳이다.

일상의 바퀴를 열심히 굴려 와 한 해의 끝자락에 다다를 즈음, 은빛처럼 푸르고 맑았던 지난 달 8일, 조선시대부터 은장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중구 병영동에서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장도장 기능전수자 임동훈 선생을 만났다.

그는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故 임원중옹의 둘째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라 가업을 물려받을 적임자로 생각했던 아버지는 25세가 되던 해 조용히 불러 “동훈아, 너밖에 없다. 네가 가업을 물려받았으면 좋겠다”며 조심스럽게 전수받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권유로 부친의 장도공방(고려민예사)에 입문하지만 반 년도 못 채우고 뜻을 굽히고 말았다”며 “20대의 혈기왕성한 청년이 온종일 공방 한 모퉁이를 지키고 앉아 장도와 씨름하기엔 너무도 힘들고 고된 작업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부친은 자식에게만 가업을 이어주길 강요하지 않았고 배우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아낌없이 기술을 전수하셨다”면서 “아버지 진심에 감동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장도공방에 입문해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으며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을 만큼 은장도에 반하게 되었다”면서 엄하게 일을 가르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병영 은장도의 기품, 오동상감 기법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번도 잘 한다고 칭찬을 한 적이 없었다”며 칭찬에 인색했던 아버지는 “내가 만든 작품을 아무 말 없이 그냥 내려놓으면 마음에 드는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못된 점을 일일이 지적하고 손수 수정했다”며 그리운 아버지를 회상했다.

“1999년 10월, 처음으로 출품한 전국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입상을 했다”면서 “아버지께 일을 배우기 시작한 지 5년이 되었을 무렵 그동안은 아버지 눈에 차지 않았지만 이제는 출품을 해도 되겠다며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했다”고 한다.

“그때부터였을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은장도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온통 은장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며 매년 울산광역시 공예품 경진대회와 공예작가 전시회, 강연 을 통해 울산 은장도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 있다. 특히 2007년 울산광역시 등록 무형문화제전에 출품한 은장도는 그 정교함이 빛을 발해 현미경으로 관찰할 정도로 감탄을 쏟아냈다고 한다.

병영 은장도는 궁(宮)의 중요한 기물에만 새길 수 있는 오동상감 기법이 유일하게 각인돼 있어 더욱 보배롭다. TV진품명품 감정사 김의숙님이 병영 은장도에 새겨진 오동상감을 보고 어떻게 울산의 은장도에 이 문양이 새겨지게 되었는지 놀라움을 금지 못했다고 한다.

은장도는 순은 덩어리를 1000도의 불에 달궈 망치로 수 천 번 두들기고 늘리기를 반복하여 0.6mm 정도의 은판으로 만든 후 은판에 칼자루와 칼집의 모형을 올려놓고 본을 떠낸다. 본 뜬 은판위에 용, 학, 사군자, 십장생 등을 조각하고 은 땜을 한 후 오목 틀에 넣고 모양을 잡은 다음 줄과 사포를 이용하여 말끔하게 마무리한다. 공정과정이 매우 정교하고 까다로운 작업이어서 한 자루의 장도가 완성되기 까지는 몰입감이 극에 달하는 과정을 거쳐야 탄생한다.

제24회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해 입상한 임동훈 장도장의 첫 작품.
제24회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해 입상한 임동훈 장도장의 첫 작품.

“경북 영주의 은장도 이수자가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오동상감을 배우러 왔었다”며 “아버지가 상세하게 가르쳐주었으나 돌아가신 후 다시 찾아와 아직도 그 기법을 익히지 못했다며 다시 가르쳐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만큼 오동상감 기법은 표현하기 힘든 기술이다. “아버지는 전통적 기법으로 투박하고 간결했다면 나는 현대적 세련미를 더했다”면서 두 작품을 비교했다.

■아버지는 늘 그립고 고마운 스승

지금도 무시로 아버지가 그리운 날에는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영천 호국원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발걸음을 한다는 그는 “아버지는 마음의 안식처이고 올곧은 정신을 이끌어 내 삶을 견지해 주신 분이시다”며 더운 눈물을 삼켰다. 

출품작이 완성되면 늘 아버지를 찾아 “이번에는 이 작품을 출품 합니다”라고 말씀드린 후 출품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은장도를 놓지 않는 한 아버지는 늘 그립고 고마운 스승이라고 말했다.

“백동판에 연습을 한 것이 나의 첫 작품이었다”면서 “버린 줄 알고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면서 나의 첫 작품을 귀하게 보관한 것을 보고 매우 감동적이었다”며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간직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10여년을 은장도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즈음 그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 찾아왔다. 2011년 실족에 의한 추락사고로 쓰러져 있는 것을 새벽녘 길가는 행인이 발견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고 충격을 크게 받아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모두가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인지능력은 물론 언어와 신체장애로 움직일 수 없을 거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과 울산의 은장도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팔을 움직이고 손끝의 감각을 다 잡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말하는 것과 인지능력을 되찾기 위해 병원에 있는 동화책은 모두 읽었고 물리치료도 이를 악물고 해냈다. 그 결과 많은 부분을 회복하게 되어 치료해주시던 담당의사가 믿을 수 없다며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공방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왼손을 사용할 수 없지만 그는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졌다”며 “이만큼 회복한 것은 은장도를 계속하라는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며 오히려 행복해했다.

비록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이 남았지만 그는 정히 닦은 마음에 얼룩이 지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 다치기 전에는 2, 3일이면 끝나는 작업이 안타깝게도 지금은 몇 달이 걸린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공예대전이 끝나면 그는 바로 다음 대전을 준비해야 한다. 한 손으로 작업해야 하는 그에게는 열 달 정도의 긴 시간이 소요되는 대장정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전승 공예대전에 출품했던 내 첫 작품이 얼마 전 나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면서 “첫 작품을 기념하며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그 친구는 30년을 간직하다 이제는 돌려 줄 때가 되었다며 나에게 주었다”고 한다. “첫 작품을 선뜻 선물한 나도 대단하지만 30년을 소중히 간직하다 내게 돌려준 친구는 더욱 멋있다”며 서로의 우정을 과시했다.

“사군자를 새긴 은장도는 2008년 울산광역시 공예품대전에서 장려상을 받았다”면서 “다치기 전의 내 마지막 작품이지만 지금 보면 미완성이다“면서 ”나의 인생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기도 하다“며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듯 당시 출품했던 은장도를 어루만졌다.   

사고로 많은 것을 잃어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그 중 하나는 운전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버스로 영천 호국원을 가려면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를 온전히 비워야 했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께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점차 몸이 회복되면서 운전면허 갱신기간이 도래해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쳐 다행히 운전면허증을 갱신할 수 있었고 그리운 아버지께 가는 길이 수월해지고 빨라졌다며 기뻐했다. 사고 이후 그의 정신력과 결기는 더욱 단단해져 풍부한 표현력으로 은장도에 혼을 입힌다. 두 손으로도 힘든 작업을 한 손으로 해내는 과정은 눈물겹지만 그래서 더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 시일이 얼마가 걸려도 포기하지 않고 은장도에 몰입하는 쟁이 다운 면모다. 아버지와의 약속도 있겠지만 은장도 만드는 일은 혼을 불어 넣어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그와 함께 오동상감의 맥을 이어가던 울산광역시 제1호 무형문화재 장추남 장도장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금 깊은 시름에 빠졌다. 수 백 년 이어 온 병영 은장도의 맥을 잇고 더 발전시켜야 하지만 그 길이 요연하다. 

“섬세한 세공술과 강한 담금질로 한양에까지 알려졌던 울산 병영의 은장도가 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며 은장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고 싶어 한다. 임동훈 전수자의 삶 깊숙이 섬세하게 각인된 울산의 은장도가 새로운 변화와 활기를 불어 넣어 재조명될 수 있기를 바란다. /칼럼니스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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