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4.01.1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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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과 객관성의 
빈곤, 가짜뉴스

퇴락과 적대의 
배설, 정치테러
김정배 논설위원
김정배 논설위원

연초부터 제1야당 대표의 목숨을 노린 끔찍한 범행이 백주에 자행되었다. 사건과 조사과정도 문제지만, 진상을 알리려는 노력보다는 정치적 공격의 빌미로 각색하는 데 혈안인 사람들, 특히 각종 매체의 보도행태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갈 데까지 갔구나’하는 절망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이솝 우화를 떠올리는 씁쓸한 세태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을 받아 인간과 다른 동물을 창조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성이 없는 짐승보다 수가 훨씬 적은 것을 본 제우스는 짐승 일부를 인간으로 변화시켜 균형을 잡으라고 명하였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명을 따랐다. 이것이 어떤 인간은 외형만 인간이지 짐승의 영혼을 갖게 된 이유이다.” ‘사람 가죽을 썼을 뿐 본질은 짐승인 인간이 허다하다’라는 의미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언제나 존재해왔던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이제는 자신의 짐승 정체성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뻔뻔스럽게 드러내놓고 심지어 치장까지 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왜 저렇게까지 퇴락의 길로 빠져든 걸까? 저명한 문화이론가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인이 “실재가 인공적 혹은 가상적 실재로 대체되고 심지어 그것에 조종당하는 과잉현실 사회에 살고 있다”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런 사회에서 시민은 근거 없이 만들어진 정보와 이미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허구의 늪에 빠지기 마련이다.

물론 우리가 당연시하는 현실이란 실은 인식된(conceived) 혹은 구성된(constructing) 현실이지 실재(reality)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종교나 철학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그러한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 노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극복이 아니라 또 다른 허상이나 주술적 권력에 기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억된 역사는 물론이고 어떤 인물이나 미디어의 언어와 이미지를 사실로 믿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이다.

더구나 수사(rhetoric)는 우리의 일상을 거의 지배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내용에서 어디까지가 실재이고 어디까지가 수사인지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정치적 수사는 정치적 현실을 창조하고, 믿음 체계를 조직하고, 결정의 주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특정 정치적 주장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닌지 판별하기 어려움에도 그것이 현실을 구성하고 그에 따라 세상이 작동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언론과 정치인의 문제가 되는 언어는 과잉현실 속에서 레토릭이 생산한 가상적 현실과 인식의 한계를 반영한 구성적 실재를 내포한다. 모종의 목적을 위해 그것에 프레임이 입혀져 시민에게 전달되면서 가짜뉴스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 확장이나 단순한 돈벌이 목적으로 거짓을 날조하여 사실로 믿게 하려는 작태가 범람하는 이유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부지불식간에 가짜뉴스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이것은 진실보다는 감정과 어떤 믿음에 호소하는 것이 선전과 이익추구에 더 효과적이라는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속성이기도 하다.
더욱이 부패와 적대의 퇴락적 문화와 시대착오적 혹세무민의 정치가 콜라보를 이룰 때 사회적 ‘희생양’은 쉽사리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것은 반복된 역사였고, 오늘도 우리는 그 서글픈 과거를 현실로 마주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70세에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진짜 이유는 사람들의 ‘증오’ 였다. 그는 지혜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저명한 정치인, 시인, 기술자를 만났다. 그러나 소문과는 달리 그들은 선(善)과 미(美)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소크라테스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자(智者)의 태도라고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싫어하고 적의를 품고 중상모략하게 된 이유이다. 수치심이 진실을 살해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사후 약 400년 뒤 팔레스타인에서 더 극적인 처형 사건이 발생했다. 청년 예수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신관이나 사회규범과는 다른 주장을 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며 하나님-예수-인간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재설정했으며, 유대의 율법을 넘어 보편적 가치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쳤다. 신성을 모독한 것이다. 진실과 정의가 두려웠던 로마 당국과 유대인 기득권 세력, 그리고 한때는 예수 추종자였던 군중이 거짓과 선동에 쉽게 전염되어 예수를 피의 제물로 삼고 말았다.

희생양 만들기는 일종의 사회적 역질이다. 안팎을 가리지 않으며 전염성이 강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휩쓸리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끝물인간들’은 역질의 먹이가 되기 쉽다. 가짜뉴스와 테러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병든 사회의 실체를 폭로하여 건강성을 회복시키고, 역사의 정당한 방향과 목적을 다시 설정하고, 담대하고 현실적인 실천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이다. 지금은 ‘화평’이 아니라 ‘검’이 필요한 때다. 천박하고 퇴행적인 역사 인식과 사회적 관행을 타파하는 일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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