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처용 만나는 재미로 사는 ‘처용탈방’ 김현우 명인
〈21〉 처용 만나는 재미로 사는 ‘처용탈방’ 김현우 명인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4.02.0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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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탈,처용무 스토리텔링 입혀
역사가 있는 관광콘텐츠로 부각
37년 처용얼굴 깎은 김현우명인
무형문화재 등재의 길이 열리길 
관용의 미소를 머금은 처용탈방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김현우 명인.
관용의 미소를 머금은 처용탈방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김현우 명인.

마음은 저만치 텅 비워놓고/ 그의 굵은 뿌리는/ 오늘도 신라쩍 어느 하늘 어느 골목으로 굽어있다.
처용아비는 보았을까, 그는/ 신라의 푸른 바람 만졌을까, 그는/ 텅 빈 몸속으로/ 녹슨 개운포 해풍 부는 오늘/ 춥다, 견디고 있다/ 키 작고 젊은 팽나무 한그루
그는 안동소주 냄새다/ 그의 눈은 언제나 놀빛 그리움이다
비오면 비오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신발 끈 푸근하게 풀고/ 요즘 처용 만나는 재미로 사는 그는/ 오늘밤 어디서 처용아비 만나 한 잔 걸치는지/ 어디서 처용아내 품고 먼 바다 건너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키 작고 젊은 팽나무 한 그루
위의 시는 김성춘 시인이 처용을 사랑한 김현우 명인에게 보낸 시의 전문이다.
2024년의 밝은 해가 용트림 하는 첫 달, 11일 처용의 넋을 생각하며 묵묵히 처용의 얼굴을 깎고 있는 김현우 명인의 처용탈방을 찾았다.
남구문화원 내 네 평 남짓 허락된 그의 탈방은 어지러운 세상을 내려놓은 듯 거나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처용탈로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김춘수의 시로 인연 맺은 처용

김현우 명인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여러 회사를 다니다 해외 근무를 1년 하고 돌아와 목재소에 취직하게 되었다. 선배들이 나무를 깎는 것을 지켜보다 책자에 있는 사진을 나무로 깎아 보았다. 부친은 짚 공예가였는데 역시 남다른 DNA를 물려받았는지 첫 작품이라 하기엔 놀라운 솜씨였다.

그는 목재소롤 5년 다니다 그만두고 처용과 인연을 맺었다. 젊은 시절 문학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김춘수의 ‘처용단장’이라는 시를 만나게 되었고 그 후 처용무와 처용설화에 이끌려 처용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 탈을 만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가 이만저만 아니었다”며 “양반집에서 이상한 놈이 나왔다며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했다”면서 “내 안에 꿈틀대는 신념이 처용에게로 이끌었다”고 했다. 

“처음에 반대를 많이 하셨던 아버지도 흔들림 없이 처용 탈에 몰입하는 진심을 아시고 아무래도 피 물림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며 응원하셨다”고 한다.

처용탈은 신라시대에 시작하여 조선시대 말기에 단절되어 계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홀로 각종 문헌을 찾아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인 1900년부터 처용탈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처용무도 시연되지 않았는데 1923년 순종 황제 탄생 50주년 기념행사 때 궁중의 미술 공장에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관용의 신(神)인 처용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인데 인자함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왜색 짙은 처용탈이 만들어져 그 탈이 국립국악원에 전송되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국립국악원의 처용 탈을 작업하였으나 ‘악학궤범’에 실린 처용 얼굴과 너무나 달라 악학궤범과 조선시대 여러 ‘의궤도’에 그려진 처용무 그림을 참고하여 독자적으로 처용 이미지를 찾아 작업에 임했다”며 “처용무는 우리의 역사이고 양심이다“면서 꼭 지향해야 할 목표가 생겼다고 했다.

“처용탈은 플라스틱이나 종이에 일회성으로 만드는 사람은 더러 있지만 나무로 만드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며 “악학궤범에도 나무나 삼베로 만드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악학궤범에는 피나무가 주재료로 쓰인다고 나와 있지만 울산에는 흔하지 않아 오동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팽나무, 은행나무 등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여러 가지 나무를 재로로 사용한다. 처용탈 조각은 크기에 따라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소요되며 이미지는 같지만 모양은 약간의 차이를 두고 작업한다. 처용탈은

안동 하회탈이나 고성 오광대 탈과는 달리 얼굴만 가리는 것이 아니라 크기도 크고 처용이 신라 때 급간이라는 벼슬을 해서 벼슬을 한 사람이 쓰는 사모를 씌운다. 사모 위에는 나쁜 귀신을 물리치는 복숭아 가지와 잎을 달고 나무로 깎은 일곱 개의 천도복숭아를 단다. 천도복숭아는 천 년에 한 번 열리는 아주 귀한 과일이고 일곱 개를 다는 이유는 동해 용왕의 일곱 아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추한다. 귀 위 두 개의 붉은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며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물리치는 벽사진경의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처용은 눈이 깊고 코가 크며 턱은 주걱턱 형태다. 처용 얼굴 그림은 조선9대 성종 임금 때 쓴 ‘악학궤범’에 처용탈 만드는 방법, 처용무복 만드는 기록, 처용무 추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김현우 명인은 “처용탈 작업에 있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파한대소가 아닌 은은하게 웃는 눈매에 중점을 두고 작업한다”며 관용의 미소를 머금은 처용을 응시했다.

김현우 명인이 제작한 크고 작은 처용탈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김현우 명인이 제작한 크고 작은 처용탈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 손자의 초등학교에 뜻 깊은 재능기부

“현재 디자인을 전공한 아들이 처용탈에 흥미를 느껴 직장을 병행하며 전수받고 있으며 초등학생인 손자 또한 처용 탈을 만드는 할아버지를 매우 존경하고 친구들에게도 무척 자랑을 한다”며 기뻐했다.

“손자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처용에 대해 배움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듣고 처용과 김현우 명인의 이야기가 담긴 동화책 ‘에비용을 깨우는 주문’과 직접 제작한 처용탈을 북구 소재 초등학교에 기증하고 재능기부로 처용관련 강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의가 끝난 후 학생들의 싸인 요청이 쇄도해 마치 연예인이 된 것 같았다”면서 처용을 닮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손자에 대한 벅찬 애정을 과감 없이 드러냈다.

또한 “2023년 국립국악원 공연에 김현우 명인이 제작한 탈을 쓴 처용무 공연이 있어 가족 모두 초대되어 매우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며 처용탈을 만드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2015년에는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주관하는 한국예술문화 명인 인증을 받았으며 2020년 종합편성채널 tvn에서 연락이 와 드라마 ‘싸이코지만 괜찮아’의 소품으로 한 손에 들어갈 수 있는 처용 목각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 드라마 소품에 그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97년 울산문화의 날 외 17회 표창은 물론 2003년 울산시 공예품대전 대상 외 22회 수상을 했으며 ‘처용에 관한 연구’외 7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그의 시간은 처용과 함께 흘러가고 있다. 

김현우 명인의 작품은 일본 나고야성 박물관과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악마박물관, 고성탈박물관, 안동하회세계탈박물관 등 국내외 여러 박물관에 소장 및 전시되어 그 위상을 떨치고 있다.

처용탈 제작은 누구에게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김현우 명인이 오롯이 혼자 각종 문헌을 찾아 이루게 된 성과다. 37년을 처용탈 만들기에 혼신의 힘을 쏟았지만 안타깝게도 독자적으로 터득하고 연구해 계보가 없다는 것이 무형문화재 선정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유다.

그는 “여러 지역의 탈이 있지만 처용탈은 풍부한 역사적 의의가 내재되어 있고 설화에 담긴 내용으로도 최고, 최상의 탈이라고 자부한다”며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879년) 시대에 서라벌 경주로부터 온 나라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풍악과 노래가 끊이지 않고 풍우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에 임금이 개운포에 출유하였다가 장차 돌아 올새 낮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을 정도였다. 이를 괴상히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되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 것이라 하였다. 이에 당해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왕명이 내리자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그래서 이곳을 ‘개운포’라 이름 지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왕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이 ‘처용’이라 했다. 처용설화에 따르면 백성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악귀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이는 길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는 처용뿐만 아니라 울산에 관련된 암각화, 궤변천신 등 울산의 역사를 담고 있는 다른 영역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작업에 임하고 있다.

‘처용님이 계시던 마을에 처용은 없고 신라의 푸른 바람이 불고 잠시 숨 돌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난데없는 일진광풍 세상이 바뀌는구나 사람아, 사람아 세상살이 고달프구나.’

처용과 깊은 인연이 되어 37년을 처용 얼굴을 깎으며 사는 김현우 명인이 쓴 ‘신 처용가’의 일부다. 남모르는 애환과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울산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처용암’이 울산만 한 가운데 바위섬으로 펼쳐져 있는 이곳에 처용탈 전시실과 처용무에 스토리텔링을 입혀 역사가 있는 관광 콘텐츠로 부각시킬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길 바라며 갑진년 새해에는 처용의 기운으로 울산이 재도약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처용과 필연이 되어 37년이란 긴 세월동안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김현우 명인에게 무형문화재 등록의 기회가 닿기를 바라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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