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구속과 목적을 벗어나 자연을 벗 삼은 박일석 선생님
〈22〉구속과 목적을 벗어나 자연을 벗 삼은 박일석 선생님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4.03.2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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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세의 나이에 20kg이 넘는
배낭 무게로 백 패킹 즐기고 
휘게 라이프로 일상 행복추구
감사함을 아는 행복한 자연인  
백패킹과 비박을 즐기는 박일석씨는 배낭의 무게에 반비례해 발걸음은 늘 가볍다.
백패킹과 비박을 즐기는 박일석씨는 배낭의 무게에 반비례해 발걸음은 늘 가볍다.

1976년 6월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35년간의 출퇴근길에 마침표를 찍고 노는 것이 아니라 쉼을 선택한 박일석 선생님을 지난 2일 남구 소재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진심으로 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산악인이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화려한 명산이나 관광객을 끌기 위해 인위적인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곳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산을 좋아한다. 

구속과 목적을 싫어하는 그는 “산은 오르는 것도, 정복하는 것도 아닌 그저 산에 드는 것이다”며 산을 찾는 소신을 밝혔다.

“산에 드는 것은 일상에 지친 심신의 안정을 위해 호젓하게 자연과의 교감을 즐기고 위로받기 위함이다”면서 “산은 한결같고 아낌없이 주는 선물이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산은 방태산이라고 한다.

“방태산은 철탑, 불빛이 없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면서 “우리나라처럼 정상석이 화려하게 장식된 산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방태산 정상석은 소박한 돌탑만 있을 뿐이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자연을 훼손해서 만든 화려한 정상석은 자연을 찾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며 주인인 그들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 입산은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몇 년 전 겨울 산을 오르며 일어나는 감정을 글로 옮겨 보았다고 한다. 웅숭, 깊은 겨울 산은 전설처럼 아득하고 은밀하다. 장안산 오름길은 장수 변암에서 장계로 넘는 무룡고개가 들머리다. 산길은 꾸준히 완만하게 이어진다.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마른 풀도 백발이 성성하다. 이쪽, 저쪽을 둘러보다 그리운 풍경들은 모두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있다. 소요는 밀도 높은 침묵이다. 지금 산사면의 나무들은 겨울 깊은 곳에서 동안거중이다.

오를 만큼 올랐을까? 머릿속이 청량하고 뱃속이 화락하다. 경사진 산비탈의 눈길을 차고 올라 막바지 능선을 오른다. 이 산의 정상은 1237m다. 짙은 연무로 조망이 제대로 트이지 않지만 지지계곡 건너 백운산의 첩첩한 산그리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대간 능선이 출렁인다. 눈앞의 산들이 점점 시야에서 희미해진다. 뒤돌아보면서 지리산이 가뭇하게 보이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산이든 사람이든 정녕 그리운 것들은 다가선 만큼 멀어지는 것일까?

“왜 산을 오르는지? 산은 무엇을 일깨워 주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았다”며 “해답은 돌아가는 것 같은 마음이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산에 들면 마음은 마치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듯한 마음이 된다”며 “오래 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민주지산으로 들어갈 때 돌아간다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마음이 가라앉아 무언가가 기다릴 것 같고 때 묻은 한 인간을 조건 없이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줄 것 같은 그런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고 그때의 분위기를 전했다.
들어가는 어프로치가 길면 길수록, 입구 부근이 험하면 험할수록 산은 포근함을 안겨준다는 것을 깨달았고 누군가가 산 속에서 나를 기다릴 것 같은 느낌을 더욱 생생하게 갖는다.

“기다리는 대상이 만약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자주 산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며 “어느 산으로 가든지 돌아간다는 느낌이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회귀에 대한 강한 느낌을 표현했다. 그렇지만 산에 들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한다. 숲속의 신선한 공기, 잘 자란 전나무 숲, 독특하게 생긴 바위, 짙은 녹음 속으로 쏟아지는 햇살, 겨울이면 하얗게 덮은 능선의 설화, 파르스름할 정도로 얼어붙은 청빙한 폭포 일 수도 있다고 산이 주는 수많은 아름다움을 열거했다.

그는 언제나 주목을 끌지 않는 변두리 산을 찾지만 그 행간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 숨어 있어 더욱 아름다운 산이 된다고 한다. 높고 낮은 재(岾)와 접근이 힘든 오지의 약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암자, 다양한 나무의 군락지, 별이 쏟아지는 숲속의 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재는 흔히 규모에 따라 령, 치, 한의 순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재는 함백산 만항재다. 강원도 정선과 영월, 태백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1330m에 달한다고 한다.

박일석씨가 순백의 눈발이 찍고 간 자작나무 숲에서 하늘을 소유하고 바람의 언어를 듣고 있다.
박일석씨가 순백의 눈발이 찍고 간 자작나무 숲에서 하늘을 소유하고 바람의 언어를 듣고 있다.

■ 백 패킹 즐기며 숲속에서 비박

“아침 일찍 산을 오르면 아침이슬이 고요하게 맺혀 있다”며 “그 이슬은 자연이 섭취 할 하루 분량의 수분이다”면서 이슬조차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자연을 아끼는 마음을 담았다.

백 패킹을 즐기는 그는 7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0kg이 넘는 배낭의 무게에 삶의 무게를 얹어 무작정 길을 떠난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무거운 배낭을 둘러메고 어디론가 떠나 흙먼지 날리는 길을 찾아 걷곤 했었다”며 “걷기는 내게 가장 큰 위안의 방식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이 “걷는다는 것은 나에게 치유이자 기쁨이고 존재의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오른 길 위에서 행복하기를, 많이 웃을 수 있기를 꿈꾼다고 한다.

“언젠가 여름 휴가철에 금강소나무를 볼 생각으로 무작정 36번 국도에 올라 걷기 시작했다”며 그때 남긴 글이다. 한 시간 남짓 걸었을 무렵 시내버스 한 대가 와서 섰다. 불영사 입구를 지나 광천교 분기점에서 내렸다. 금강소나무 숲까지는 13.3km가 남았다. 소광천이 오른쪽으로 흐르는 길에는 혼자여서 말 붙이는 이가 없어 좋고, 또한 성의껏 대답 할 필요가 없어 더욱 좋았다. 길은 늘 비워져 있고 걷다보면 햇빛, 바람, 소나기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꼭 가야 할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누구와 지켜야 할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편한 발걸음이다. 30분쯤 걸었을 무렵 트럭 한 대가 와서 섰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 소광리 소나무 숲에 간다고 답했다. 낯선 시골길을 걸으면 후한 인심에 마음은 더 풍요롭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마을까지 태워 주겠다며 소나무 숲을 보러 왔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진짜 그것 하나 보러 왔냐고 재차 묻더니 참 취미도 희한하다며 우리는 맨날 봐서 그런지 감흥이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트럭에서 내려 다시 걸었다. 소나무 숲까지는 2시간 거리다. 계곡 따라 오르는 길, 갈수록 숲이 우거지고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 왼쪽에서 따라온다.
사무치는 외로움이 때로는 깊은 깨달음과 새로운 발견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우의를 꺼내 입고 신발 끈을 조여 맨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빗줄기와 바람 사이를 떠도는 진한 소나무향이 코끝에 감겨온다. 제법 굵은 소나무 한 그루를 끌어안고 수액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려 애써본다. 흐려진 귀에는 소나무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나무의 숨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아직 세상을 다 잊지 못한 것이라고 한 시인이 말했다던데 도대체 세상을 다 잊는다는 일이 잠시라도 가능한 것일까 생각해 본다. 비를 맞으며 숲길을 걷는 동안 무수한 길들이 일제히 일어나 내 앞에 펼쳐지는 것 같고 기억들이 아우성치며 달려들어 소나무 숲길을 걷는 내내 어지럽고 슬프고 아련했다.

이윽고 500년 된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한 눈에 봐도 풍채가 예사롭지 않다. 이 나무는 우리가 살지 못했던 과거에서 오고, 우리와 함께 미래로 향해 간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면서 “어째서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아픔은 이토록 오래 가는 걸까” 라고 비에 젖은 소광리 소나무 숲에서 답 없는 물음을 묻는다.

■ 산에 드는 것은 즐겁고 설레는 행복

“산은 무서운 집념과 강건한 신체조건을 요구한다”면서 “그 요구는 투자한 뒤 보상으로 정상의 가장 신선한 한 모금의 대기와, 발아래 펼쳐지는 아름다운 조망을 아낌없이 제공한다”며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해 산을 오르지 못한다면 슬픈 일이라고 했다.

“즐거운 마음, 설레는 가슴으로 맞게 되는 초입부의 계곡이거나 능선에서부터 긴장을 풀어 놓는 일종의 알코올 같은 성분이 대기 속에는 분명히 존재한다”며 “마음으로, 눈으로, 피부로 다독여 주는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위로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고 겹겹이 쌓여 안아주는 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80년도 중반에 전국을 누비며 여행한 기록을 모아 책을 발간해 보겠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결국 흐지부지 되었다”며 “나보다 훨씬 잘 만들어진 책도 잘 읽지 않는데 괜한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 싫었다”고 말했다.

비록 행복한 글과 아름다운 사진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지 못하지만 그의 삶에 숨결을 불어 넣어주는 값진 자산이 되어 요동칠 것이다. 많은 소유가 아니라 자족하는 삶을 살며 감사함을 아는 그는 이미 부자다. 모든 생물들이 오므렸던 미소와 꼭 다물었던 속삭임의 말을 배시시 입을 열며 기지개를 펴는 봄, 소박한 봄꽃 한 송이로 피어나고 싶다던 그가 어느 산, 어느 나무숲에서 물오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지 궁금하다.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자전거보다 걷는 것을 택한 그의 발자취가 행복한 쉼이 되기를 바란다. /칼럼니스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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