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전쟁〉 유감
〈건국전쟁〉 유감
  • 울산시민신문
  • 승인 2024.03.20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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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신념이 소환한
논쟁적 인물의 초상
 
다큐멘터리의 함정에 포획된
눈먼 아우성 
김정배 논설위원
김정배 논설위원

큰 선거가 있거나 격렬한 정치적 다툼이 있을 때 어김없이 소환되는 것이 역사였다.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일’인지를 놓고 벌어진 정통성 논쟁이 대표적이다. 최근 다큐멘터리 〈건국전쟁〉도 기본적으로 그 연장선에 있다. 감독의 언행과 각종 매체의 기사나 논평, 뜨겁게 호응하는 일부 정치인과 시민의 주장이나 태도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그런 식의 이념전은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기는커녕 사실 왜곡과 상대에 대한 적개심만 증폭시키기 마련이다.

물론 역사논쟁 자체는 나쁠 것이 없고 시대 전환기나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전개된 혁신주의운동이 그런 경우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 사회는 급속한 독점자본주의 발전으로 정경유착, 부패, 인권유린이 극에 달했다. 그 폐해를 청산하기 위해 사회 각 부문과 주 및 연방 차원에서 대대적인 개혁이 전개되었다. 당연히 개혁을 정당화할 논리가 필요했다. 역사학자 비어드(Charles A. Beard)는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 1913』에서 미국인에게 신성시되던 헌법이 실은 ‘건국의 아버지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문서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개혁의 ‘사상적 무기’ 역할을 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역사 재해석과 인물 재평가 시도는 온당하다.

문제는 사실이 아니라 특정 신념에 기초하여 파당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저급한 논쟁이다. 역사에 대한 무지와 정치적 목적에 사로잡힌 의도적 왜곡과 자의적 해석은 시민을 속이고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건국전쟁〉이 쉽지 않은 일인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여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점, 호불호를 떠나 이승만을 불러내어 비극적 역사를 다시 짚어보도록 자극한 점은 평가할만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감독은 〈건국전쟁〉이 그동안 “왜곡 날조된 이승만”이 아니라 “자유민주의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애쓴” ‘진짜’ 이승만의 이야기라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신뢰하기 어렵게 만든다. 첫째,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이 진실을 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무시한다. 특정 신념과 의도를 가진 제작자는 그에 맞는 프레임을 짜고 다양한 자료를 자신의 가치와 능력에 따라 취사선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실과 진실은 왜곡된다. 관객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각자의 지적 수준과 정서적 차이 때문에 필요한 내용만을 그것도 이미지로서 소비한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는 체계적이고 교활한 역사 왜곡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둘째, 감독은 균형 잡힌 역사 인식보다는 특정 이념에 복무하는 듯한 해석을 당연시한다. 그의 입장과 시각에서는 기존의 해석이 이승만의 “공은 지우고 과만 부각 된” 점이 있을 것이고, “좌파들이 교묘하고 사악하게 독재자 이미지를 덧씌운” 것으로 의심하고 분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승만 지우기, 이승만 죽이기라는 거대한 공작의 설계자가 북한입니다. 남한의 친북 주사파세력은 그 지령대로 움직였고요. 정신적으로 간첩이었습니다”라는 감독의 주장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감독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다짐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거짓말을 하는 세력과 싸우려는” 섬뜩한 복수심이 가득한 모양이다. 〈건국전쟁〉 이 사회적 독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셋째, 감독은 미국의 목적과 냉전의 작동 원리를 자의적이고 선택적으로 전제한다. 이승만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정책의 공과를 평가할 때 미국은 고려되어야 할 핵심 변수다. 해방,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유엔의 승인,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 한국 관련 거의 모든 문제를 결정했던 트루먼 대통령의 평가는 의미심장하다. 

“내가 미군철수를 승인한 이유 중 하나는, 비록 작은 것이지만, 미국이 신생 한국의 정치적 다툼에 말려들지 않기가 어렵다는 위험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강한 신념의 소유자였으며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참아내지 못했다. 1945년 귀국 순간부터 극우적 인물들을 끌어들이고, 좀 더 온건한 정치지도자들과는 첨예하게 갈렸다. 군정 종식은 그의 반대자들에 대한 독단적 행위를 막았던 억제수단(restraints)을 제거해버린 셈이다. 정치적 모임을 깨고 정적을 통제하기 위해 이승만 경찰이 사용한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나라를 휩쓴 심각한 인플레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관심 부족이 크게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일본에 정복당하고 짓밟힌 이후 한국은 다른 지도자와 지도력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뒤틀린 유리잔’의 진짜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듯 매우 어렵다고 한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시민 누구나 주어진 조건에서 역사를 평가하고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하지만 역사에 ‘공적 질문’을 던지는 자라면 먼저 이승만 정권이 도륙한 희생자들 앞에 고개 숙이고 역사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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