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의 다방(茶)열전
정은영의 다방(茶)열전
  • 정은영
  • 승인 2013.03.2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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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원 다방-

“그 다방에 들어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 약속시간 흘러갔어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싸늘하게 식은 찻잔에 슬픔처럼 어리는 고독/ 아 사랑이란 이렇게도 애가 타도록 괴로운 것이라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가슴 조이며 기다려요” 나훈아 노래 ‘찻집의 고독’이다.

이 노래가 넘쳐나던 시절, 다방은 오갈 데 없는 히피족의 무리들이 하루 종일 죽치던 곳, 미안하면 커피 한잔 시켜놓고 줄담배를 피워대던 공간,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어떤 이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시를 쓰기도 했고 가끔은 불우이웃돕기 일일 찻집이 열리기도 했던 소중한 공간이었다. -편집자 주-

울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과 더불어 산골에서 도시로 몰려든 청춘들이 바글바글 했다. 갈 곳 없는 이들의 휴식처가 됐던 다방은 근래 들어 외국계 커피 전문점들에 밀려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흘러가버린 추억을 되새김질 하듯 울산지역 다방을 중심으로 추억여행을 떠나본다.

산업화의 물결이 도시 전체를 휘감았던 울산, 60년대를 지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울산의 원 도심 옥교동과 성남동은 건물마다 다방이 있었다. 그야말로 도심은 다방천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다방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다방과 함께 사회활동을 해오다 근래 들어 사회로부터 퇴출을 당하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에게 다방이 사라진다는 것은 삶의 문화 중 한 축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 시절, 모두들 열심히 살았다. 쉬는 날도 없었다. 연장근무를 하느라 회사에 서 밤을 지세우기가 예사였던 시절, 다방은 이들에게 짬나는 휴식공간이었다. 추억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다방, 엉덩이가 빠져버린 푹신한 의자에 앉아 애인의 이름을 낙서하던 청년들이 베이비부머 세대다.

이들은 유명 커피 점에서 마시는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보다 설탕 두 숟갈 하면 통했던 다방 커피 맛을 잊지 못한다. 다방 아가씨의 샐쭉한 웃음도 이제는 빛바랜 앨범속의 잃어버린 향수가 됐다. 다방이 사라짐과 더불어 마담과 레지라는 단어가 생소해지려고 한다. 그 때 그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매화꽃이 만발했다는 봄이다. 무료함을 달래기라도 하듯 70·80년대 가장 잘 나갔던 다방 명소를 찾아 남구 공업탑 로터리 원 다방을 찾았다. 원 다방은 남서쪽 창으로 공업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당 터였다. 원 다방은 오래전 영업을 하지 않은 흔적들이 역력했다. 청동 출입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출입문 틈새로 보이는 내부는 테이블과 의자 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문을 닫으면서 집기 등을 그대로 두었던 것 같다.

한때 울산 제일의 다방으로 이름을 날렸던 원 다방 치고는 모습이 초라했다. 거미줄이 쳐진 다방은 추억을 들추기조차 썰렁했지만 청동 출입문만은 지금도 당장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였다. 다방 주인의 예술적 감각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푸른 이끼가 낀 출입문이 그나마 과거의 화려했던 원 다방 시절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원 다방이 울산 최고의 다방으로, 약속과 만남의 중심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울산의 관문 공업탑 로터리는 울산 전역으로 통하는 지리적 요충지라는 이점으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공업탑을 마주한 원 다방도 늘 함께 북적였다. 그 때는 원 다방 1층 상가들에 참고서를 파는 서점들을 비롯해 보석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를 견디지 못한 지금은 겨우 서점 한곳이 문을 열었을 뿐이다.

당시 원 다방은 2층으로 오르는 출입구가 2개였다. 동서로 출입이 가능했던 원 다방은 자리가 빌 틈 없이 없었다. 특히 공업탑 방향 자리는 커피를 마시다가도 자리가 비면 커피 잔을 들고 옮겨갔었다. 다방 안은 늘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금지곡으로 지정된 이장희의 ‘한잔의 추억’이나 송창식의 ‘고래사냥’들이 분위기를 돋우었다.

영욕의 세월, 하지만 변화를 견디지 못한 원 다방은 울산 공업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한 채 지금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낡고 낡은 계단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흔적이 낙서로 남았던 벽은 최근 새로 페인트를 칠하는 등 단장되면서 과거의 역사를 묻어버렸다. 「숙아, 왔다 간다」「사랑한데이」비뚤비뚤한 글씨가 정겨웠던 공간도 말끔히 지위 져 버린 원 다방 계단 벽이 왠지 낯설었다.

다방의 공중전화 이외는 연락을 주고받을 길이 없었던 시절, 다방 계산대 전화는 기다리는 사람을 찾는 전화가 줄을 이었다. 때로는 한나절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차 한 잔을 마시고 죽치기가 미안해서 연거푸 두 잔이나 세잔을 시켜 마시면서도 마담의 눈치를 봤다.

원 다방에서 마담의 끗발은 대단했다. 울산의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원 다방 마담의 눈치를 봤다. 원 다방 마담의 입은 울산 공업탑 만큼이나 대단했다. 그녀의 한 마디는 울산 정치 흐름을 바꾸기도 했으니….

마담이 양장을 한 다방과는 달리 원 다방 마담은 한복을 차려입고 무게를 잡았다. 레지들도 대 여섯 명이 있었다. 원 다방 마담이 울산을 움직인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원 다방이 울산에 미친 영향도 대단했었다고 이 다방을 단골로 드나들었던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원 다방과 북적였던 다방은 울산시외버스 터미널이 중구 우정동에 있던 시절, 터미널 다방이었다. 이 곳 역시 만남과 이별의 공간이었다. 마담의 눈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하릴없이 성냥개비를 부러뜨리며 시름을 달래던 숙이도 있었고 잠시 갔다 온다며 여인을 버리고 도망가던 총각이 터미널에서 붙잡혀 들어와 시끄러웠던 곳도 그곳이었다.

장발의 머리에 젊음과 낭만을 노래했던 이들에게 다방은 쓴맛의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닌, 공돌이와 공순이가 사랑을 속삭였고, 서러움을 달랬던 만남과 기다림, 애환의 장소였다.

지금은 모두 50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중년임을 확인시켜주는 7080세대들에게는 못내 아쉬움이 묻어나는 추억들이 가슴을 시리게 했던 공간, 가끔은 맞선을 보는 장소가 되기도 했던 곳, 그 시절 도라지 위스키 한잔을 시켰던 다방은 흔적을 감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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