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의 다방열전 세 번째 이야기
정은영의 다방열전 세 번째 이야기
  • 정은영
  • 승인 2013.04.0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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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다방'

7080 세대들에게 1970~1980년대 한창 잘 나가던 다방을 기억 하느냐고 물으면 추억의 LP판을 들먹인다.

젊음을 불태웠던 그 시절, 산업역군으로 일했던 그 때 사람들이 2~3년 전부터 명퇴자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삶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들이 새로운 직업을 찾아 울산으로 왔던 그 때 처럼 말이다.

▲ 먹거리월성다방 앞 먹을거리 골목, 지금도 호떡이나 만두 등이 인기다. 월성다방이 있었던 건물은 리모델링이 한창이다거푸집을 설치한 건물 2층이 월성다방이 있었던 곳이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반까지 울산 중구 옥교동 중앙시장 먹자골목 입구, 당시로서는 울산에서 가장 괜찮은 스피커가 설치됐다고 소문이 난 곳으로 월성 다방이 있었다.

이 다방은 구 상공회의소 근방에 있었던 모아 음악 감상실의 시설을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2층 다방으로 들어서면 오른편 코너에 DJ박스가 있었고 장발의 DJ가 안경을 닦는 세무가죽수건으로 LP판을 손질하고 있거나 신청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판을 찾고 있는 모습들을 7080 세대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추억이 못내 그리운 모습이다.

음악다방 DJ들의 자유스런 옷차림과 함께 이들이 끼고 있는 헤드폰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음악 감상 도구였다. 일반인들이 DJ용 헤드폰을 사용하기는 쉽지 않은 시절, 헤드폰을 낀 DJ의 모습은 젊은 청춘들에게 대단한 인기였다.

▲ 월성다방에서 나오면 만나는 골목, 이 골목 끝이 시계탑 사거리와 연결된다.

DJ가 잘 생겼거나 감미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음악다방은 빈자리가 없었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밤 9시가 되면 청소년들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던 시절, 음악다방은 외로운 청춘들의 아지트였다.

그 때는 듣고 싶은 음악을 신청하면 오래 기다려야 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담배에 희망 곡을 써서 뮤직 박스에 밀어 넣으면 다음 곡으로 신청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 가서도 멸치 젖을 얻어먹을 수 있음이다. 당연히 DJ는 그 담배 개비를 물고 바깥으로 나가서 시원하게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다.

이처럼 희망 곡을 신청하는 스타일도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이들은 메모지에 편지를 쓰기도 했었다. 그래서 많은 DJ들이 바람기가 있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던 시절, 그래도 음악다방은 대중문화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80년대를 지나면서 다방은 사회적 변화에 따른 우여곡절을 겪게 되기도 한다. 울산은 예외였지만 다른 도시들은 민주화를 위한 목소리들이 언 땅에서 새싹 돋듯이 우후죽순으로 돋아나면서 운동권 학생들이 숨어들던 공간 또한 다방이었다.

그 시절은 총각들이 야유회 파트너를 찾기 위해 다방을 찾기도 했고 실제로 다방에서 우연을 핑계로 만난 청춘들이 결혼으로 골인 했던 이야기들도 많다. 당시 월성다방의 DJ는 뮤직 박스 안에서 이들의 숨바꼭질 사랑을 훔쳐볼 수 있었으리라.

한때 음악다방에서 잠시 DJ로 있었다는 J씨(56)는 “음악다방은 퇴폐문화로 인식됐던 장발 청년들이 주 고객이었다.”고 기억한다. DJ는 머리카락이 한쪽 눈을 가렸거나 꽁지머리 스타일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들이 그 시대의 대중문화를 이끄는 첨병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월성다방 주변은 지금의 생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번잡한 곳이었다. 중앙시장 먹자골목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옷 수선 골목이 있었고 바로 그 길에서 왼편 계단을 오르면 월성다방이었다.

월성다방은 진흥상가로 들어가는 길목과 접해 있었기 때문에 늘 젊은이들이 북적였다. 이 골목은 울산에서 먹자골목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음악다방으로 인기를 구가하던 월성다방은 80년대 초 어느 날 갑자기 간판을 내렸다. 한창 잘 나가던 때 월성다방 간판이 내려지고 주막집 간판이 올려졌다. 밥주걱에 메뉴를 적어서 걸어놓았다. 아마 이때부터가 음악다방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한곳 두 곳 업종을 바꾸던 시기였던 것 같다. 월성다방이 주막으로 바뀐 이후 울산 최고 번화가의 명성도 공업탑 등 신흥 개발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음악다방이 간판을 내린 또 다른 이유는 1976년부터 시작된 대마초 단속이었다. 그 시절 상당수 톱스타들이 대마초라는 암초에 걸려들면서 인기 가수들을 중심으로 연예인들에게 혹독한 시련이 시작됐다.

가수들뿐만이 아니라 DJ들도 대마초 수사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음악다방이 대마초 소굴처럼 인식되면서 퇴폐문화의 온상처럼 돼 버렸다. 경찰의 수사가 확산됐고 유명 DJ들이 걸려들었다. 유명 방송 DJ들이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언론에 노출되면서 연예계는 쑥대밭이 됐다.

당시 대마초에 걸려든 가수들이나 연예인들은 방송출연이 금지됐고 약 4년간의 공백기를 겪은 후 해금이 되면서 가수 활동이 재개 됐다. 이 때 대마초 단속은 상당수 연예인들이 종교 지도자로 활동 하는 기회가 됐다.

 

월성다방이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지금의 중앙호텔은 기독교병원이 있었고 70년대의 시계탑 네거리 일대 분위기는 화려했다. 시계탑 사거리 도로가 왕복 2차선으로 교행이 이뤄지던 시절, 강변도로는 가끔 시내버스가 다닐 정도였지만 시내 중심도로는 왕복차선이 밀려드는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었다. 또 울산의 중심지답게 각종 보석점들이 있었고 건물들 사이사이로 다방들이 촘촘했다.

추억하건데 월성다방에 들어서면 지금은 작곡가이자 목사인 윤항기의 ‘장밋빛 스카프’를 비롯해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 이종용의 ‘너’ 정종숙의 ‘달구지’ 임성훈의 ‘시골길’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은 등의 노래가 70년대 후반기와 80년대를 아우르며 청춘들의 희망 곡 랭킹 베스트 10을 차지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 이후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 역시 전성기를 누렸고 이들의 시대가 끝나면서 음악다방도 한 시절을 마감하는 수순에 들어갔다. TV가 각 가정으로 확대 보급되면서 방송을 중심으로 대중음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면서 음악다방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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