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번화가에 자리했던 약속장소
가장 번화가에 자리했던 약속장소
  • 정은영
  • 승인 2013.04.17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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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옥교동 청자다방
▲ 뉴코아 아울렛에서 본 청자 다방 건물, 대리석 처마가 옛 추억을 되살려준다.

청자 다방을 모르면 울산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청자다방은 음악 감상실 ‘모아’보다 더 알려졌던 음악다방이었다. 울산 최고의 음악다방으로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현재 성남동 뉴코아 아울렛 맞은편 옥교동 다이소 매장 2층에 청자 다방이 있었다.

엊그제 청자 다방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겨울이 어느 틈에 봄을 앞세우고 여름 맞이를 하듯 날이 더웠다. 성급한 여성들의 옷차림은 초여름이다. 반소매 차림이 어색하지 않다. 가로수들은 연녹색 잎사귀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과거 시계탑 사거리를 중심으로 구 시가지가 북적일 때의 청자 다방 위치가 아날로그 세대들의 기억 속에는 고스란히 남아있지만 찾아가보니 어디쯤엔가 하는 헷갈림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 당시 DJ로 한창 인기를 날렸던 지인에게 당시 옥교동과 성남동 다방 지도를 부탁했다.

그가 보내준 지도는 정확했다. 다방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감탄 또 감탄했다. 시계탑에서부터 지도를 참고로 자를 재듯이 한 걸음, 두 걸음 옮겨가면서 주변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전영의 노래 ‘어디쯤 가도 있을까’ 처럼 청자 다방은 어디쯤일까, 하는데 뉴코아 아울렛의 옥외매장이 마주쳤다. 가판대에 겨울 상품들을 땡 처리하는 행사가 한창이었다. 걸음을 멈추었다. 뉴코아 아울렛 쪽에서 건너편 건물을 바라봤다.

오래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2층 추녀 마감재가 대리석이다. “그래 그렇지,” 아직도 건물은 그대로 있었다. 옆 벽면의 유리창이 깨진 채로 있었다. 이곳에 청자 다방이 있었지 간신히 기억을 더듬었다.

아슴푸레한 기억 속에 자리한 청자 다방은 흔적이 없지만 터와 건물은 그대로 남아 옛 기억을 정리하게 했다. 당시 청자 다방 주변은 울산 최고 번화가였다. 뉴코아 건너 태화강 방향의 그 때 태일 약국은 기준시가로 울산에서 가장 비싼 땅값으로 이름이 났었다.

▲ 구시가지 다방위치도

(뉴코아)아울렛의 전신인 주리원 백화점 이전에는 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속했던 청자 다방 건물은 울산 사람 누구든 약속장소 기준점이 됐다. 1층 건물들이 즐비하던 시절, 시계탑 사거리에서 울산교 방향으로 나오면 가장 높은 건물, 청자 다방은 늘 북적됐다.

1970년대 말 고등학교에 다녔다는 홍대식(55)씨는 가끔 방위라고 속이고는 사복을 입은 채 청자 다방을 자주 들락 거렸다고 기억한다. 그는 청자 다방이야말로 울산 최고 음악다방이었다고 말했다. 다방이 청소년들의 출입금지구역이던 시절 이야기가 지금은 아릿한 추억이 되고 있다.

7080 시절 청자 다방은 3명의 DJ가 활동하고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과수씨(60대 초반)가 울산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최고시절을 보냈던 곳이 청자 다방이다. 그를 보기위해 청자 다방을 찾았던 골수팬들이 많았다.

그는 여성 팬들이 많았던 울산의 유명 DJ로 이름을 날렸다. 청자 다방은 울산 최고 음악다방답게 방송국 못지않은 프로그램으로 유명했다. ‘정오의 희망 곡’을 비롯해 ‘2시에 만납시다.’ ‘한밤의 DJ쇼’등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2시에 만납시다.’를 진행하는 시간대는 평일에도 다방 안은 사람들로 넘쳤다.

야간에도 청자 다방은 빈자리가 없었다. 실내는 늘 담배 연기가 자욱했었다. 다방 안의 분위기를 기억하면 탁자는 노래 신청용 메모지, 돈표 성냥 곽이 놓였었다. 심심한 청춘들은 성냥개비를 ‘뚝뚝’ 분지르면서 무료한 시간을 축냈다.

“어이, 레지 엽차 한 잔 더” 할라치면 눈초리가 샐쭉하게 올라간 아가씨가 엽차 잔을 갖다 주면서 “커피는 안 시키능교” 했던 시절,  그 꿈 많았던 젊은 청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울산상권이 공업 탑을 거쳐 삼산으로 가버린 지금, 이 일대는 한산했다.

▲ 시계탑 사거리로 나가는 길목, 아케이드가 설치되면서 상권이 살아나고 있다.

이곳에 점포 하나만 가지면 부자소리 듣던 중앙시장 골목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과거 태화극장이 있었던 곳은 공사를 하느라고 어수선 하다. 태화극장에서 중부소방서로 가다 태화강변으로 돌아나가면 코너에 울산 극장, 조금 더 가면 지금은 사라진 천도극장이 그 때는 최고의 문화시설로 인기를 끌었다.

극장에서 나온 사람들이 마땅히 갈 곳을 정하지 못하면 우선 들르고 보는 곳이 청자 다방, 2층 계단입구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었다. 달랑 커피 한잔에도 무거운 사랑을 담았던 그 때가 봄 햇살 아지랑이로 피어난다.

7080 세대들은 김만수의 ‘푸른 시절’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더니 어느 날 공원에서 그 녀를 만났다네’ 한창 젊음을 누렸던 그 때를 추억하면서도 명퇴자의 신분이 된 지금 서글픈 생각이 드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아! 옛날이여’ 라는 대중가요처럼 그때 그 시절이 노랫말처럼 콧등 찡하게 그리워진다. 청자 다방을 찾아가면서 그 때의 흔적이라도 발견할까 싶어서 인터넷을 뒤졌지만 울산 청자 다방의 이야기는 다방에서 피워 올렸던 청자 담배의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다.

전국에는 ‘청자 다방’ 간판을 단 곳이 아직도 수십여 곳 있었다. 명동 청자 다방을 비롯해 지역마다 청자 다방 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곳이 제법이다. 이들 도시들이 부러워진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옛것이 사라짐이 아쉬워짐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다.

울산 중구도 시계탑 일대를 중심으로 울산의 인사동 이라고 별명을 붙인 종갓집 문화의 거리를 만들었다. 울산초등에서 시작해 시계탑 사거리를 지나서 울산교까지 이어지는 문화의 거리, 걷다가 무작정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청자 다방이 복원 될 수는 없을까, 인간이 절망하지 않고 사는 이유는 과거의 아릿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이 일대는 서양식 커피 점들이 무수하다. 커피 값도 상당하다. 문화의 거리가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잃어버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떠 올리는, 추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거리가 되고 있다. 이 거리 어디 메에 청자 다방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게 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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