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극장 맞은편 청춘들의 해방구
태화극장 맞은편 청춘들의 해방구
  • 정은영기자
  • 승인 2013.04.17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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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맥심다방
▲ 태화극장 맞은편 2층, 맥심다방이 있었던 건물, 지금은 외국계 프랜차이즈 업체가 입주해 있다.

전신이 나른하고 노곤한 날이다. 꽃샘추위라고 하기에는 거북한 늦봄 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햇볕은 뜨겁다. 차 안의 온도가 화끈하다.

차창을 내리고 7080 가요 CD를 듣는다. 오랜만에 듣는 낯익은 목소리다. 고인이 된 최병걸이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지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 이 노래는 1977년과 78년 그 후 까지 대중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버스가 주요 교통수단이던 그때 시내·시외버스를 막론하고 차에 오르면 난 ‘정말 몰랐었네’라는 최병걸의 히트송이 영순위로 방송을 탔다. 장발이 대세였고 경찰은 그들을 붙잡아 다짜고짜 가위질을 했었다. 아가씨들은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경찰은 자를 들고 다니며 무릎 위 30㎝를 단속했다.

살기가 무던히도 힘들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추억 속에서는 화려한 청춘으로 변할 수 있는 그 시절이 그리운 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밤 열두시가 통금이던 때, 방범대원이 곤봉을 딱딱대며 통금 위반자를 붙들기 위해 거리를 누볐다. 이때 붙잡히면 이튿날 호송버스를 타고 부산 부전동 부전역 앞 즉결 심판소 까지 가서 벌금을 물어야 했다. 서글픈 시절의 추억이다.

7080 세대, 이들이 사회활동을 시작한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으로 앞만 보고 뛰었다. 곳곳에 포클레인 굉음이 요란했다. 낮에는 열심히 일했고 퇴근 후 시내로 나온 청춘들은 음악다방으로,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영화는 상영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고 대신 음악다방이 북적됐다.

▲ 계단, 맥심다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지금도 계단은 그때 것 처럼 오래된 모습이다. 지하는 경양식 고인돌이 있었다.

그 때는 그들의 정신적 공허감을 해결할 놀이문화가 별로 없었다. 요즘 같은 봄 날, 청춘들은 휴일을 어떻게 보냈을까, 직장인들은 남구 용연동 세 죽 마을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을 타고 춘도 섬으로 야유회를 갔고, 무료한 청춘들은 시내에서 휴일을 보냈다. 휴식 공간 일 번지 음악다방이 분잡한 이유였다.

지금 외국 커피 전문점에 청춘들이 북적대듯이 그때 음악다방이 그랬다. 낭만과 젊음이 공존했던 시절이다. 이 다방, 저 다방 배회하며 석양 나그네가 됐던 그들은 하얗게 눈이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마음은 청춘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저만치 가버린 세월, 친구들에게서 청첩장이나 받는 중년 아저씨 아주머니가 됐다. 갈 곳 없는 청춘들의 발길이 머문 곳, 맥심다방이 그런 곳이었다.

맥심 다방은 극장가 중심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태화극장에서 나오면 오른편으로 비스듬히 마주보는 건물 2층이 맥심 다방이었다. 지하는 경양식으로 유명했던 고인돌이 있었다.

맥심다방 창가에서 극장 방향으로 앉아 있으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모두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아는 누군가가 어떤 이성을 만났다는 소문이 이곳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 주변에도 이런 소문이 났던 형들과 누나들이 있다.

맥심은 젊은이들이 많이 들락 거렸다. 음악다방으로는 인근 청자다방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명성에 조금 밀렸을 뿐이다. 유명 DJ들은 청자다방에 버금갈 정도로 많았다. 맥심다방이 한창시대를 구가했을 때 홍대식(같은 이름이 많음), 정대석, 정경용 등의 유명 DJ가 뮤직 박스의 주인공들이었다. LP판을 든 DJ들의 길쭉하고 가냘픈 손가락, 불그레한 조명에 빛나는 눈빛, 푸른색으로 반쯤 가려진 유리창 넘어 뮤직 박스는 판타지아 바로 그것이었다.

▲ 메가박스 앞 도로, 울산의 명동이라 불리는 곳, 메가박스는 옛날 태화극장이 있었던 자리, 극장 맞은편 2층이 맥심다방이다.

그 시절, 음악다방에서 뜨는 노래는 방송국 인기가요 순위에 곧바로 올랐다. 음악다방의 존재가치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때는 커피 인심이 후했다. 먼저 나가는 사람이 커피 값을 냈다. 또 돈이 없어도 남자가 커피 값을 내던 때다. 지금 생각하면 눈물 날 만큼 아련한 추억일 뿐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DJ가 장발의 머리카락을 튕기듯 쓸어 올리는 손짓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 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대중문화를 이끄는 문화 첨병이었다. 맥심 다방은 인근 청자 다방과 함께 울산 원 도심 음악다방 문화를 이끌었다. 팬들은 DJ를 따라서 다방을 옮겨 다녔다.

그러나 음악다방이 퇴폐문화로 낙인 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 월성다방이 없어진 이후 불과 몇 년 사이에 울산지역 음악다방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장희의 ‘불 꺼진 창’은 쓸데없는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신중현의 ‘미인’은 가사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면서 청바지를 선호했던 청춘들은 갈 곳을 잃었다.

그 후, 영화계도 마찬가지였다. ‘고래사냥’ 등의 영화가 히트 하면서 송창식의 '고래 사냥‘도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영화는 심의 기준에 걸려들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가차 없는 가위질로 인해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이 크게 바뀌기도 했다고 한다. 방금 극장에서 본 영화 스토리가 다방으로 옮겨지던 그때 맥심다방에 가면 영화음악도 들을 수 있었다.

1980년대는 바야흐로 대중문화가 방향타를 잃어버린 시기였다. 도심은 긴급조치 발동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었다. 고고장이 디스코 장으로 변해갔고 음악다방은 한곳 두 곳 간판이 내려졌다.

힘들고 고달팠던 시절, 지금처럼 그 때도 중앙시장 입구 뉴코아 아울렛에서 울산소방서를 지나 전신전화국(KT)을 연결하는 골목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그 골목을 일없이 서성이는 청춘들이 많았다. 그 때도 지금처럼 이 골목은 울산의 명동이었다. 300여m의 골목이지만 울산 젊은이들이 다 나와 있는 것처럼 북적였다.

그 골목을 중심으로 태화극장과 천도극장, 울산극장, 시민극장 등이 있었다. 시민극장은 성남동 지금의 연극 공연장으로 옮겨서 수년전까지 상영 하다가 문을 닫았다. 극장 주변은 다방이 많았다. 맥심다방도 태화극장 맞은편이었다. 극장과 다방은 불가분의 관계처럼 됐다. 극장 주변은 다방이 많았고 다방 주변은 극장이 많았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맥심다방에서 소방서로 가다보면 만나는 파란풍차 빵집도 명소였었다.

특히 소방서에서 태화강으로 나가는 골목은 천도극장, 끝 지점에 그랜드호텔이 있었다. 그랜드 호텔 커피숍이 어른들의 공간이라면 맥심다방과 그 주변은 젊은이들의 공간이었다. 다방 열전을 쓴다고 했더니 누가 이런 말을 했다. 그 때 다방은 따뜻한 난로 같은 공간이었다고.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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