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중구 병영에 가면 푸근하게 사람 냄새가 나는 다방이 있다. 병영에서 유일하게 남은 길 다방이다.
한때 병영은 옥교동과 성남동 일대를 제외하고는 울산에서 다방이 가장 많았던 곳이다. 1980년대만 해도 병영에서 눈에 띄는 것이 다방이었다. 마야문명이나 잉카문명이 눈이 녹듯 한 순간 사라져 버렸다는 역사학자들의 설명처럼 어느 날 갑자기 다방은 우리들 주변에서 흔적을 감추었다.
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대한민국 경제가 불꽃처럼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때는 다방이 백수들의 쉼터가 아닌 비즈니스의 공간이었다.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기 위한 약속은 당연히 다방이었다. 다방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환경이 한몫을 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에만 해도 상가가 문을 열기 전, 다방 아가씨들이 오토바이에 물병을 싣고 단골 상가에 물 배달을 다녔다. 단골들에 대한 그들의 서비스는 대단했다. 물 배달도 다방끼리 경쟁 했다. 심지어 먼저 갖다놓은 다른 다방 물병을 치우고 자기 다방의 전화번호가 새겨진 물병을 새로 놓고 갔다.
병영지역 다방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커피를 배달하다 길거리에서 만난 아가씨들끼리 싸움이 붙을 때도 있었고 싸움이 확대 되면 마담끼리 머리채를 잡는 일도 가끔 있었다. 기억해보면 삼일 아파트 일대가 병영 역이었고 역 주변은 볼품없는 슬레이트 건물 몇 채가 듬성듬성 있었다.
기업은행이 입주해 있는 건물은 정미소였다. 그 정미소가 문을 닫고 부품을 가공하는 철공소가 들어섰다가 그 후에 낚시점으로, 가구점으로 간판을 바꾸더니 2012년 지금의 스마트한 건물이 완성되면서 은행과 병원이 입주, 면모를 달리하게 됐다.
병영에 다방이 많았던 진짜 이유는 약사천변과 병영 역을 중심으로 2~3명 종업원이 있는 철공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고객으로 선술집들이 늘었고 다방에서도 도라지 위스키를 팔면서 자연스레 다방이 늘어나게 됐다. 철공소 사장들은 아침에 공장 문을 열자마자 단골 다방에 모닝커피를 시켰다. 다방 아가씨 얼굴 한 번 보고 그 날 일을 시작하던 때가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됐다.
다방에 아가씨가 새로 왔다고 하면 하루에도 같은 다방에 커피를 몇 번이고 시켰다. 기름 손으로 짓궂은 장난을 치는 바람에 아가씨들이 울고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 당시 철공소 커피배달은 이 지역 다방의 주요 매출이었다.
장사가 잘 되던 병영지역 다방들이 문을 닫는 시기가 왔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변두리 철공소에도 커피 자판기가 보급됐고 일회용 커피가 인기를 끌면서다. 철공소 마다 일회용 커피 박스가 수북해 지면서 그만큼 다방 커피 배달이 줄었고 어느 날부터 병영지역 다방들이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으로 업종을 변경하는 스티커를 철공소 사장들한테 나눠주기 시작했다. 다방이 세상과의 작별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병영에는 다방이 씨가 말랐다. 약사천변 철공소들도 모두 떠났다. 다방 열전을 쓰기 위해 병영 경남은행 맞은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병영 일대를 돌고 돌아 다녔다. 병영 유치원 후문이 있었던 복개 천 상가 지하에 병영 다방이 있었는데 노래방으로 바뀌었다.
병영 막창 골목을 한 바퀴 돌았다. 막창 골목은 화려했다. 막창 골목 곳곳에 노래방이 들어섰다. 간이 주차장에도 미니 커피 전문점이 있다.
병영에서 다방 찾기를 포기했다.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한곳만 더 가보기로 했다. 병영 동사무소 주변이다. 이곳은 삼일 아파트로 통하는 횡단보도가 번영로에 걸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 기념관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수년전 횡단보도와 접한 병영동 사무소 측 대로변 2층 건물에 다방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노래방으로 간판이 바뀌었다.다리에 힘이 풀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병영동 사무소 마당 보호수나 보고가야지 했다. 병영 우체국과 병영파출소(폐쇄) 사이로 난 길로 들어섰다.
갑자기 뒤통수가 당기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맞은편 건물 2층에 길 다방이 있었다. 산삼을 찾아 나선 심마니의 심정처럼 반가웠다.길 다방은 창가에 선인장을 비롯해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감성이 풍부한 주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다방은 일찍 찾아가는 바람에 커피를 마시지는 못했다. 조만간 다시 찾아올 것을 스스로 정했다.
길 다방은 병영 파출소와 우체국 동사무소로 이어진 중심 지역에 있다. 한때는 이들 관공서 출입 민원인들의 단골 쉼터였다고 주변 상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병영 역 철길 빈터에서 철공소를 했던 박상진씨(58)는 “그때는 이 다방을 비롯해 병영 일대에 다방이 많았고 마담들의 인심이 후했다”고 추억했다.
그는 커피를 석잔 시키면 인심 좋은 아가씨들이 다섯 잔을 갖고 와서 프리마 까지 완벽하게 황금 비율로 타 주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그 시절 청년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어 버렸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가끔 철공소 총각과 데이트도 했던 아가씨들, 한 시대를 살다간 레지들의 푸른 꿈들이 노스탤지어로 남았다.
병영의 유일한 다방, 길 다방은 병영지역 인문학을 이끄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싶다.
요즘의 트렌드는 낡고 오래된 옛것을 지역 주민들이 되살리는 운동이 대세다. 우리는 병영에 한 곳 남은 길 다방만이라도 7080 세대들의 추억 공간으로 남겨두었으면 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적 고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밤, 이 다방에서 플롯이나 대금 연주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 느낌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