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이두남
  • 승인 2016.07.04 11: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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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시간의 울렁증이 생겼다. 생의 사거리에서이다.

익숙한 길은 더 익숙하고, 낯선 길은 더욱 낯설다 

시간에 바이러스가 생겼는지 반환점을 돌면서 가속도가 붙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타이어 탄내 나듯 낯설게 다가온 풍경에서 급정지를 하기도, 황색 선을 넘기도 했다. 얼마나 서성거렸던가. 길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애초 길 위에는 이정표도, 목적지도, 되돌아 갈 길 또한 보이지 않았다. 앞만 보고 부지런히 달려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체와 후진이 거듭되고 있었다는 의심 또한 떨칠 수 없었다.

어느 날 문득 잠시 되돌아 본 풍경이 이토록 아득할 줄이야.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다윗 왕이 기쁠 때는 교만하지 않고, 슬플 때는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찾던 중 신하들의 혜안으로 반지에 새기게 된 글귀이기도 하고 유태인들이 가장 좋아했던 ‘지혜의 서’ 미드라쉬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리 힘든 일도 그 끝은 있고, 아무리 좋은 일도 영원할 수는 없다. 다만 고통은 더 빨리 끝이 나고, 기쁨은 조금 더 오래 지속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눈을 뜨면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있고, 무서운 사건들이 화면과 지면을 채우는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단순히 치부하는 일 또한 이미 식상해 있기도 하다.
이럴 때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중국 국경지방에 ‘새옹’이라는 노인이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노인은 말 한필을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의 땅으로 도망을 쳤다. 이웃사람들이 이를 안타까워하며 위로를 했다. 그러자 노인은 “이 일이 복이 되어 돌아올지 어떻게 알겠소.” 하고 오히려 덤덤해 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도망쳤던 말이 암컷 말 한 필을 데리고 왔던 것이다. 이웃사람들은 노인이 말한 대로 오히려 그것이 복이 되어 돌아왔다며 축하를 하자 노인은 이것이 화가 될지 어떻게 아느냐며 말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에 이웃 사람들이 다시 위로하자 이것 또한 복이 될지 모르는 일이라며 슬퍼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랑캐가 침략해 왔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가 희생되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힘들다고 우리의 삶이 영원히 힘든 것은 아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하려거나 도피하려고만 하면 더욱 큰 어려움에 직면 할 수도 있다. 세상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

‘새옹지마’란 과거의 고사만이 아닐 것이다. 작은 일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극단적인 판단을 하거나 자신을 학대하는 지금의 세태를 보면서 ‘새옹지마’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나 자신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지 못한 채 후진하고 있는듯하여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영혼을 팔고서라도 간절히 잡고 싶은 순간을 그려보게 된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는 욕망에 찬 파우스트가 영원한 젊음을 대가로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된다. “영혼을 걸고서라도 붙잡아 두고 싶을 때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참아름답구나’ 라고 말하면 내 영혼을 주겠노라“는 그의 외침이 왠지 모르게 크게 들려온다.

실제로 내 영혼을 걸고서라도 붙잡고 싶은 순간이 불현듯 찾아온다면 절대 놓치지 않고 곁에  두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주어진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새싹을 틔울 것 같지 않던 삭막한 산에도 저토록 푸름이 짙어가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무더운 여름도 머지않아 고운 색깔의 바람과 옷으로 갈아 입을 것이다. 환희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같은 눈에서 흘리며, 고(苦)와 락(樂)도 같은 가슴에서 느낀다. 

긍정의 힘을 발휘하여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어려움을 오히려 도약하는 힘으로 바꾸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새로운 에너지와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백마가 달리듯이 낭랑하게 자신의 복운을 부르며 용기 있게 도전한다면 운명은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 이두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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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2016-07-27 23:12:28
이 글을 보니 영혼을 걸고서라도 붙잡고 싶은 순간이 생각 나기도 합니다
멋진 글 속에 빠져드는듯 곱씹어 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