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와 생선 /배월선
도마와 생선 /배월선
  • 이시향
  • 승인 2021.08.31 17: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마와 생선   /배월선

 

눈을 감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억울한 주검의 등을 벌써 네 마리나 다듬었다
푸른 바다를 유영하던 날이 일제히 몰려와서
칼이 오갈 때마다 파도가 부서졌다
비늘을 터니 불룩해진 배,
무엇인가 할 말을 잔뜩 품었다
저라고 좋은 날만 있었겠나
눈살을 찌푸리며, 속엣말을 듣기 위해 나는
옆구리를 찔러 비릿한 생의 기록을 모두 끄집어냈다
비밀문서가 된 내장을 해독하기란 어려웠다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의,
어디선가 서로 씹히고 씹었던
어슷썰기로 질끈, 썰려나갔던 활자들
미처 말하지 못하고
제 뱃속에만 고민처럼 앓고 지낸
수많은 속엣말이 개수대로 흘러 들어갔다
천길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지는 말과 말 사이
거룩한 이름을 불러주었다
세상사 모두 잊고 떠나라고
부디 좋은 곳에서 영면하라고 진심 다해 빌었다
누구나 도마 위에 올라야 하는
마지막 순간이 온다는 걸 미리 생각한다면
맛있게 잘 구워진 생선을 어찌 먹을 수 있겠나
껍질째 바삭바삭 씹으며,
한 공깃밥을 다 비운 다음에야 드러나는
나의 유골을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