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저수지 / 이명윤
누군가 양팔을 크게 벌리면
세상의 길이 모여드는 곳이 있다면
길이 찰랑찰랑 발을 담그고
길이 첨벙 머리를 물속에 넣기도 하고
길이 아이들처럼 동그랗게 가슴을 맞대고
길이 사뿐사뿐 춤을 추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갈래 머리 곱게 땋은 길이
공중을 지나가는 곳이 있다면
오늘의 슬픔은 그저
발목이 젖을 만큼만 슬픔,
나 기꺼이 울음 위에 두 발로 떠다니겠네
걸음 위에 걸음이 다정히 내려앉고
시간 위에 시간이 천천히 걸어가며
몸을 부대끼며 따듯해진 길들이
일제히 음악처럼 날아오르는 곳이 있다면
그리하여 떠나는 길이
참 행복했다, 말할 수 있다면
두 팔을 접으면 모두 유유히
한 장의 사진 속으로 아름답게 사라지는
그런 곳이 정말
우리들 세상에 있다면
-시집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 2020,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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