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최고로 평가된 암각화 보존안 또 '휘청'
문화재 최고로 평가된 암각화 보존안 또 '휘청'
  • 정두은 기자
  • 승인 2022.09.2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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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맥질’ 국보 이번 태풍에 또다시 침수
어렵사리 올 4월 마련한 암각화 보존책
대구-구미간 취수 갈등에 물 건너갈 판
시 “식수 확보 전제없인 수문 설치 불가”
독자적 소규모 댐 건설 등 다각적 검토
태풍으로 침수되기전 수면 위로 드러난 반구대암각화
태풍으로 침수되기전 수면 위로 드러난 반구대암각화

[울산시민신문] “나 숨 넘어가요!”

무려 57년간 물고문에 신음하며 애타게 광명을 갈구하지만,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가 있다. 울산 태화강 최상류인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대곡천의 물길이 휘감은 거대한 수직암벽에 선사시대 사람들이 새긴 그림, 반구대암각화다. 

지난 1995년 국보로 지정된 암각화는 올 여름 극심한 가뭄으로 대곡천이 마르면서 오랫동안 전모를 드러내 보이더니 이달 들어 강한 비바람을 동반한 연이은 태풍(난마돌, 힌남노) 탓에 또다시 침수됐다.

그윽한 산세에 둘러싸여 천혜의 절경을 이룬 반구대 암벽 하단 가로 10m, 세로 3m 크기의 매끈한 면에는 신석기인과 청동기인들이 남긴 사람과 짐승, 생활모습 등의 그림 296점이 있다. 특히 58점의 고래와 고래사냥 그림은 7000여년 전 한반도의 선사인들이 인류 최초로 거친 바다를 누비며 고래를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인 포경(捕鯨·고래잡이)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암각화의 경제적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2009년 4월 문화재 중 으뜸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내놓은 '문화재의 공익·경제적 가치분석 연구'에 따르면 반구대암각화의 연간 경제적 가치는 4926억 원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국보 32호 팔만대장경 3079억 원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암각화는 1965년 하류에 울산 식수원으로 건설된 사연댐 수위에 따라 침수와 노출, 침식이 해마다 반복돼 차츰차츰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자맥질' 국보라는 오명을 쓴 채 반복되는 물고문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3년간 연평균 69일 동안 물에 잠겼다. 암각화 보존을 위해 댐 수위를 낮출 것을 주문하는 문화재청과 식수가 부족해 그럴 수 없다는 울산시가 팽팽히 맞서는 사이 방치된 암각화 표면의 훼손은 가속화·심화되고 있다. 그동안 보존책을 놓고 생태제방, 유로변경, 카이네틱댐(임시 물막이) 설치 등 다양한 방안을 논의했지만 번번이 거액의 예산만 날리고 흐지부지됐다. 

올해 4월 어렵사리 암각화 보존책으로 체결한 정부와 낙동강 수계 지자체 간 ‘맑은 물 상생 협정’도 물 건너갈 판이다. 사연댐 수위를 낮추는 수문을 설치하고 대신 부족해진 울산 식수는 경북 청도 운문댐 물을 끌어오는 것인데, 최근 대구와 구미 간 볼썽사나운 물싸움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대구는 구미와 해평취수장 공동 이용 문제를 두고 갈등을 보이자 지난달 17일 관련 기관 간 협정을 공식 파기한다고 발표했다.

상황이 이렇자 울산시도 사연댐 수문 설치 작업을 사실상 중단했다. 시는 지난해 5월 사연댐 수문 설치 효과를 분석하는 연구 용역을 시행해 올 2월 마무리 했다. 시 관계자는 “수문 설치는 식수 확보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물 확보가 되지 않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며 “내년 예산안에 수문 설치 관련 예산이 잡힌 것도 현재로선 없다”고 밝혔다. 

시는 대신 독자적으로 맑은 물을 확보하고자 소규모 용수댐 건설 등 다각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추경에서 용역비 15억 원을 확보했다. 이에 일각에선 사연댐 앞에 둑을 쌓아 물길을 트는 생태제방을 다시 추진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암각화 훼손 문제는 어제오늘 일 아니다. 살리자고 한 게 벌써 20년도 더 됐다. 그새 상당 부분 망가졌다. 물길 돌리든, 수위 낮추든 빨리 구해야 하는데 한세월 논쟁이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반구대암각화는 수십여년 침수와 노출을 반복하면서 암면의 암석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며 “이 상태가 지속되면 세계유산 등재는 커녕 유네스코가 멸실 위험이 있는 유적을 관리하는 위험 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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